백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김구 인생의 스토리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1.12.11 14:32 |

  ⓒ수도권타임즈
상권은 인·신 두 아들에게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서 1년 동안 쓴 편지 내용이다.

 

이 내용은 태어나면서부터 54세 임시정부까지 오게 된 파란만장한 김구의 생활을 진솔하게 피력하고 있다.

 

김구가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에는 『내 인생을 돌아보며』에 잘 나타나 있다.

 

김구는 자식들에게 대하여 “아비 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 된 의무를 받고 싶지도 않다. 너희들이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라는 바램이었다.

 

백범은 가난한 집안에 자손으로 글을 배우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배움의 욕구가 많았다. 여러 사람의 권유에 의해 여러 책을 읽었지만 그것이 인생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백범은 삶의 성공을 위해 과거 준비를 했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김구는 『상서』를 읽으면서 감명을 받았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김구는 “상 좋은 사람(好相人), 보다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러한 결심은 18세(1893년) 때 ‘동학’에 들어가게 되었고, 여기서 인생의 여로가 시작되었다.

 

그 후 팔봉접주가 되었다. 정부군에 의해 내몰린 김구는 동학접주로서 피신중인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가 머무르는 청계동에 머물게 됐다. 여기서 스승 고능선 선생을 만나 한학을 공부 했다.

 

이 때 김구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했다. 김구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으로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신국민을 꿈꾸었지만 패전 장수 신세가 되었다. 김구는 안 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서 암담해 했다.

 

고 선생은 김구에게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라고 위로했다.

 

김구는 고 선생에게서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실행·계속의 세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다.

 

청년 김구는 청나라 여행을 실행에 옮겼다. 목적은 북행견문과 청국시찰 등이었다.

 

행상을 하며 평양을 거쳐 북청, 함흥으로 갔다. 김구는 여행 하면서 고을의 교육제도에 관해 관심을 두었다. 백두산, 혜산진, 압록강 건너편 중국 땅인 모악산까지 왔다. 여기서 호통사들을 만났다. 이곳에 사는 동포들은 주로 청일 전쟁 때 피해온 사람들이었다. 호통사들은 중국 사람에게 빌붙어 온갖 못된 짓을 하던 사람들이다. 통화, 환인, 관전, 임강, 집안 등을 여행했다.

 

복수 의거, 치하포 사건

 

여관에서 한국인으로 변장한 일본사람(왜인)을 만나자 김구는 돌변했다.

 

“저놈이 우리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가 아닐까? 생각했다. 경성에서 일어난 분란 때문에 도망하여 당분간 숨으려는 것은 아닌가? 만일 미우라가 아니더라도 미우라의 공범일 것 같다. 여하튼 칼을 차고 숨어 다니는 왜인이 우리 국가와 민족의 독버섯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내가 저놈 한 명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치욕을 씻어 보리라”

 

김구는 청년의 용맹으로 용기를 내어 일본 중위 쓰치다를 살해했다. 곧바로 포고문을 써서 벽보를 붙쳤다.

 

“국모 복수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이노라.”

 

마지막 줄에는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 써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게 했다.

 

김구는 마을 대표를 불러 “네가 이 동네 동장이니 안악 군수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라. 나는 내 집으로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리겠다. 기념으로 왜놈의 칼은 내가가지고 가겠다”고 배짱 좋게 말했다.

 

김구는 인천옥에 첫 번째로 투옥되었다. 어머니 곽락원(현풍)은 감옥 인근에 방을 구해 바느질로 김구를 뒷바라지 했다.

 

역사적인 심문

 

심문이 시작됐다.

 

“본인이 그날 그곳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구 한 명을 때려 죽인 사실이 있소.”

 

심문하는 옆에 서 있는 와타나배를 향해 김구는 소리쳤다.

 

“이놈. 소위 만국공법이니, 국제공법 어디에 국가 간의 통상 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항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이 같은 김구의 당당한 심문 내용은 대·내외적으로 퍼져나갔다. 이런 연유에서 김구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고 많은 사람이 김창수(김구)를 구하기 위해 애를 썼다.

 

김구는 옥중생활을 통해 많은 독서를 했다. 독서를 통해 김구는 고 선생의 민족주의를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서양의 급변한 상황을 이해하고 터득했으며 교육만이 민족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감옥생활에서 대서(代書), 성악(聲樂)까지 섭렵했다. /TSMoney.com

 

Copyrights © 2006 www.sntimes.kr All Rights Reserved
공감 비공감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