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낙중, 기자 맞아?  
어쩌다가 성남투데이가 이 지경에…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2.18 11:38 |

홍승면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고 한다.
"누가 나에게 전공을 묻는다면 '나는 저널리스트'라고 말해왔지만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나의 전공은 인간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
(<기자 홍승면>)

 

'빈섬'의 블로그 '옛날 다방 2호점'에 실린 글의 일부다. 빈섬 역시 오랜 경력을 지닌 저널리스트다. 대학 때부터 빼어난 저널리스트였던 '기자 홍승면'을 기억하고 있던 터다. 우연히 최근 빈섬의 글을 접하고 가슴에 물결이 일었다. 인용 대목에 이르러선 뭉클했었다.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오래 전부터 언론도 인간을 탐구한다는 생각을 잃은 적이 없다. 인간의 탐구는 인간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학문이나 '타자들 속에 뛰어든 나'라는 삶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각종 이념이나 당파이데올로기의 세뇌 또는 신체화에서 자유로운 것도 이 때문이다.

 

언론이 인간을 탐구한다고 해서 그 인간이 '인간 그 자체'라고 이해해선 오산이다.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초기 마르크스를 '인간의 얼굴'로 읽어 후기 마르크스와 단절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그 인간이란 '인간 그 자체'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는 인간 그 자체의 부정에서 사유운동을 시작했다.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이 있다면 가령 인간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어른인가 아이인가, 식별 불가능한 덩어리(mass)적 인간인가 식별 가능한 개체적 인간인가 등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의 탐구에서 존재가 아닌 활동, 즉 노동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때까지는 신과의 관계라든가 프랑스인, 독일인, 이태리인과 같은 국가주의적이거나 내셔널한 인간관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필요노동을 초과하는 잉여노동의 생산으로부터 산업자본주의를 해명할 수 있었던 것도 인간 그 자체의 부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이란 활동을 통해 마침내 우리 시대의 인간을 '재발견'한 것이다.

 

언론이 인간을 탐구한다고 할 때, 한 가지 유의미한 방식은 사건 속의 개별적인 인간을 그가 맺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탐구는 보기 힘들다. 오히려 사회적 관계들이 전경화되고 개별적인 인간은 소거된다.

 

때문에 언론에는 '가짜사건(pseudo-events)'이 난무한다. 가짜사건으로 지면과 웹 사이트를 도배하는 것이 오늘날 언론의 추악한 몰골이다. 아마 자기가 쓴 기사를 모아 책으로 만든다고 하면 열에 아홉 '기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도망치고 말 것이다.

 

지역언론 수준에서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취재와 기사쓰기, 소통의 ABC조차 훈련받지 않은 자들이 온갖 '쓰레기기사'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역언론을 한답시고 설치고 다니면서 독자가 듣거나 말거나 제 목소리만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 지방지 시대에 검찰의 정기적인 검거 대상이었던 사이비기자의 반복이 아닐 수 없다. 아니 더 하다! 이처럼 일말의 양심조차 찾아볼 수 없는 쓰레기기사, 쓰레기기자, 쓰레기언론이 양산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지역언론이 유달리 많은 성남은 대표적이다.

 

특별히 '성남투데이'를 찍어 말하련다. '사례적'이기 때문이다. 책임을 맡고 있는 '기자 김낙중'을 찍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유가 있다. 취재와 기사쓰기, 소통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채 뛰어든 지역언론이라면 차라리 골계이지만 제법 연륜이 쌓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를 이을 기자 하나 키우지 못한다. 연륜으로 보면 칼럼이나 논설이 나올 때가 지났다. 칼럼이나 논설은커녕 기자수첩 하나 나오지 않는다. 해설기사조차 찾아볼 수 없다. 기고는 정파적 행위를 일삼는 외부 시민단체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기사의 주류는 완벽한 '어용언론'을 자인하고 있다. '미리 요리된 뉴스', 즉 관의 보도자료(news release)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편향된 정보를 마냥 흘리는 것이다. '선전선동'의 교과서인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적용된 사례를 보는 느낌이다.

 

그 뿐인가. IP 접속 차단을 통해 비판적인 의견을 봉쇄한다. 악의적인 목적으로 기술부리는 것이다. 아예 '독자의 의견'이라는 난이 없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수준 이하의 지역언론들과 달리 교활한 것이다. 이만하면 완벽한 '지역언론의 사유화'다.

 

곧 지역언론을 하는 한 인간의 문제다. 기자 김낙중의 문제다. 아니 김낙중이라는 인간의 문제다. 동시에 이런 찌라시적 행태와 반독자적 행태는 은혜를 타락으로 되갚는 추악한 짓이다. 조건없이 여러 해 그와 성남투데이의 성장을 도왔기 때문이다.

 

기자 홍승면을 생각하게 된 것도, 그것을 실마리 삼은 것도 언론으로서나 인간으로서나 기자 김낙중을 고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에서다. 낯 뜨거운 줄 모르는 한 인간의 그 불온함을 고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에서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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