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쓰레기통에나 처박아라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2.07 14:27 |

"인민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 백성과 더불어 동고동락하는 사람, 대중의 감수성을 체현하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인자가 아닐까?" 성남투데이에 이따금 칼럼을 올리는 한덕승이 최근 칼럼에서 말한 것이다. 국회의원 할 사람은 인자여야 한다는 소리다.

 

인자가 불인자보다 좋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소리는 하나마나한 소리다. 실은 주어진 문제 앞에서 아무 것도 의미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동양적 정치의 이상인 '성인론'이나 그 방법론인 '수양론' 수준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독법은 인의 사상가 공자와는 전혀 무관하다. 바울이 예수를 죽이고 기독교를 창시했듯이 공자를 죽이고 유학을 창시한 맹자 이래의 흔해빠진 유가적인 독법에 지나지 않다. 공자의 인은 유가의 성인론, 수양론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공자의 언어는 '대관계', 즉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그것을 넘어선 어떤 적극적인 의미와도 공자는 무관하다. "인이 멀리 있는가. 내가 인을 바라면 여기에 인이 온다(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논어》) 인은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는 말이다.

 

'백성'과 같은 흐물흐물한 '덩어리(mass)'를 끌어다가 그것에 대한 감수성을 말하는 것은 공자 이후 공자의 시체를 끌어다가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 그 이전에 존재하지도 않은 '대중'이니 '인민'이니 하는 덩어리를 운운하는 것도 '사후적인 투사'에 불과하다.

 

이런 인에 대한 오독도 그냥 보아 넘길 수 있다. 지와 인식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된다고 알면 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독이 뜻없는 반복구, 즉 '상투구'를 정당화하기에 이르러선 그냥 보아 넘기기가 어렵다. 공론장에 출현한 글에는 책임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인으로서 '진정성(authenticity)'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투구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국회의원 후보들! 문제는 '스펙'이 아니라 '진정성'(이라구!)." 스펙이 아니라 진정성이라구? 그래서 뭘 어쩌라구! 대체 뭘 어쩌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진정성의 윤리는 원래 서양의 낭만파에서 유래한다. 절대적인 신과의 관계에서 '신실성(sincerity)'을 윤리적 이상으로 삼았던 중세와는 달리 루소나 헤르더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이 소위 개인의 '내면'이라는 것을 '창조'해 윤리의 토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진정성의 윤리는 외재적인 공동체의 윤리를 자기의 내면으로 이동시켜 성찰하는 것이다. 왜 성찰하는가? 성찰 후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기 위해서다. 즉 진정성의 윤리는 사회적 저항의 기초다. 진정성, 그것은 사회적으로 '저항의 열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성찰'과 '저항'이란 두 가지 키워드로부터 진정성의 윤리는 언뜻 정당화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진정성의 윤리가 내포한 함정이 있다. 자기 긍정의 키 워드가 실은 자기부정의 키 워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성의 윤리는 위험하다. 

 

첫째, 그 성찰이란 자기와의 대화에 지나지 않다. 자기와의 대화는 전혀 대화가 아니다.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듣는 모놀로그(monologue, 독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에게 '거룩한 명령'처럼 들린다. 바로 거기에 신도 어찌할 수 없는 타자가 배제된다.

 

둘째, 성찰이 저항의 기초가 되어야 할 필연성은 전혀 없다. 즉 성찰과 저항은 전혀 별개의 범주로 필연적인 어떤 것으로 연결짓는 것은 순전히 '자의'에 속한다. 그것은 성찰하는 주체가 내면적이며, 따라서 타자가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성을 강조하는 자들이 '물(物, 현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심(心, 이데올로기)'에 빠지고 만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진정성을 들고 나올 때, 그것이 무엇이든 비교되는 것이 단지 진정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덕승이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진정성을 강조하는 자들에게는 물이 심으로 해소되고 만다. 충분히 겪어봤지만 이들보다 지독한 관념론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것은 뜻없는 동어반복, 상투구가 특징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첫째, 타자가 없으니 대관계, 즉 타자와의 대화가 있을 리 만무하다. 둘째, 따라서 상대하는 타자와 타자와의 대화에 상응하는 대관계의 생생한 의미나 가치가 있을 리 만무하다. 진정성을 강조하는 자들에게는 오로지 진정성이 '전부'일 뿐이다.

 

왜 진정성이 문제되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운동권은 윤리적 이상으로 진정성을 높이 여겼다. 운동권의 강력한 일파였던 주사파 내에선 그 변형이라 할 수 있는 '품성론'이 말해졌다.

 

겨울공화국이던 독재적 상황, 내면의 억압으로 짓누른 변혁의 과제 앞에서 이른바 운동권에선 '투신'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진정성의 윤리는 한 시대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87년 체제의 성립 이후 운동권은 스스로 붕괴되고 말았다.

 

사회주의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성장의 성과와 맞물려 이른바 '스노비즘'이 팽배해졌다. 이 때부터 다시 '포스트' 차원의 진정성이 말해지기 시작했다. 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이 뿌리내린 '진보진영'에서 진정성의 윤리가 살아남은 것이다. 90년대의 일이다.

 

왜 진정성이 문제가 되는가? 그것을 '역사'로 되돌려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현실 앞에서 무지와 게으른 인식을 정당화해주는 수단으로 흔히 쓰이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지와 게으른 인식을 반복케 하는 심리적 기제에 지나지 않다.

 

한덕승의 상투구도 이 때문에 나왔다. 주어진 문제 앞에서 꼼꼼히 따져도 뜻 하나 건지기 어렵다. 현실은 살아 움직이며 지와 인식보다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진정성의 노예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쓰레기통에나 처박을 '한 물건'일 뿐이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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