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남의 생각?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5.20 12:04 |

한 수레의 책을 읽으면 뭐 하나? 한 구절도 때에 맞게 인용할 수 없다면? 한 수레의 책을 읽으면 뭐 하나?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한 구절도 새겨두지 못하면? 전자는 인식의 공유와 더불어 그 적실한 쓰임에 관한 것이다. '지의 사유화'는 죽었다 깨어나도 반대해야 하는 것이므로. 후자는 "변형독해"(메를로 퐁티)라는 것이다. 이것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제인 제이콥스는 "공동발전 없이는 발전은 있을 수 없다"(《자연의 경제학》)고 말한다. 자연에서든 경제에서든 발전은 서로 의존하는 공동발전으로 거미줄(web) 같이 얽혀 있다. 공동발전의 얽힘(network)이 없으면 발전은 있을 수 없다. 공동발전으로부터 나온 분화는 '교환'이기 때문이다. 발전은 교환을 통해서다. FTA 반대론자들은 여기에서 부딪친다.

 

이 원리를 이용해 그녀는 "도시가 먼저, 시골의 발전은 나중"(《도시의 경제》)이라고 말한다. 시골에서 점차 도시로 발전한다는 흔해빠진 인식을 뒤집은 것이다. 골빈당들은 이 주장을 보고 듣고 그래서 판단하는 '경험적 수준'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그녀가 말한 것은 반대다. 도시를 도시이게끔 하는 'D+A=nA'(D=일의 분업, A=새로운 활동)을 말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녀는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막대한 양의 계산된 투자나 국가권력에 의한 중앙집중화된 도시계획, 경제계획 따위에 반대한다. 동시에 같은 이유에서 그녀는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일정한 방향이 없는 자생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차이짓기'를 지속시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비나니, 복지론자들에게 복이 있을진저!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책읽기를 말하면서 웬 뚱딴지같은 소리, 삼천포로 빠지냐고? 아니다. 이 역시 책읽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책도 세상의 일부이며 데카르트가 말했듯이 "세상이야말로 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에서는 '공동발전'이란 '인식의 공유'이며 동시에 '발전'이란 '책이나 책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한 구절을 새겨두는 행위'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 "주절주절 나의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만 인용한다"고? 헛소리! 시장형님 이재선이 나의 글들을 두고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비방한 것이다. 시샘? 피상적(경험적) 인식? 전자라면 봐줄 만하다. 사람의 그릇에 관한 것이니까. 후자라면 그가 한 수레의 책을 읽은 자라도 얼른 도 닦으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인식의 뿌리인 마음의 심천이 문제이므로.

 

인용하지 않고 씌어진 책이나 글의 99%는 실은 100% 남의 생각의 인용에 불과하다. 이미 오래 전 나름의 책읽기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자 확실히 알게 된 사실이다. 함부로 책을 고르거나 아무 책이나 읽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실은 철학사에서 '오리지날을 강조하는 실재론과 카피를 강조하는 유명론의 대립'으로 논해져온 문제에 다름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미 '삶의 조건'은 과거처럼 책이 귀한 시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말이지 책이 흔해빠졌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오리지날이 이미 카피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 사실을 대개의 작가들이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생각이 이미 남의 생각의 인용이라는 사실, 나의 생각이 실은 '인용투성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생각"이란 99% 착각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다른 작가들과 내가 구별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인용을 인용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사실 이것은 거의 유일한 '인용의 윤리'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인용된 남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 아니며 동시에 남의 생각이지만 나의 생각으로 공유한다는 뜻이다.

 

이 태도는 다른 작가들과 다른 어떤 고유성일지 모르겠다. 학문적인 글이 아닌 '잡글'에서 이런 글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용구절은 한결같이 만만치 않다. 그 주인들은 인류의 스승과도 같다. 인용에서 나를 위로 하고 그들을 밑으로 하는 오만이 나올 수 없다. "주절주절 나의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만 인용한다"는 말을 문제삼는 이유다.

 

이재선의 말은 오만 그 자체다. 오만도 부릴 사람이 부려야 수긍이 간다. 그가 오만을 부려도 될 만큼 지적인지 과연 누가 알겠는가. 인용구절 앞에서는 오히려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인용구절은 이렇게 주장하는 탓이다. "조심해, 짜샤! 나는 보석, 내 주위의 것들은 빛바랜 납덩이야!"(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것이 글쓰기의 어려움이며 고통이다. 보석 같은 인용구절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한 구절을 새겨두는 행위의 어려움이며 고통이다. 여기에서 두 개의 길이 갈린다. 하나는 어용학자 또는 요즘 문제되고 있는 주사파와 같은 사회주의자가 걷는 길이다. 이 길은 인용구절을 전거나 '교시'로 받아들이며 주절주절 해설된다. 다음은 그런 사례 중 하나다.

 

"머리가 없이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듯이 현명한 지도부, 당중앙위원회가 없이는 우리 당이 활동할 수 없으며 당의 지도를 떠나서는 우리 인민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고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습니다."(《김일성저작집》제14권, 《민족과 철학》 재인용) 전위당에 관한 이 인용구절은 교시로 작용하며 "민중의 최고 뇌수는 수령" 운운으로 주절주절 해설된다.

 

다른 하나는 어떤 글을 쓰든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질문에 맞닥뜨리는 길이다. "글쓰기의 예술을 편견없이 검토해보자.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쓰는가? 누구를 위해서?"(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길은 인용구절과 대적하는 길이다. 때론 동질화를, 때론 뒤집기를, 때론 한 구절을 새겨두려는 변형, 변용, 변질을 시도하는 길이다.

 

사르트르는 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작가는 독자의 자유와 교섭하기 위해서 쓴다"고 답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런 이유에서 이재선은 나의 글 <나는 예외?>에 달았던 무수한 댓글들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것은 독자로서의 '이재선의 자유'이기는커녕 자신의 댓글들에 대한 독자의 자유에 대한 '이재선의 억압'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와 다른 지점이 있다. 그것은 글쓰기의 긴장과 절망, 어려움과 고통의 극복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비약, 때문에 '어둠 속의 비약'이다. 이 점이 사르트르가 쓰는 것을 "원초적 선택"이라고 말한 것과 다른 점이다. 그의 생각은 '자유롭지만 나의 의식적인 결정'이나 나의 생각은 '자유롭지만 신도 어쩌지 못하는 타자의 강요'인 까닭이다.

 

이 점에서 어둠 속의 비약은 종종 즐겁다. 무엇보다도 비약이라는 의식 밖의 근거는 교환의 성과물을 교환 성립 당시에는 자유이지만 교환 성립 후에는 억압으로 변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게 한다. 비약의 특성이다. 인류를 경악케 한 '킬링 필드'의 주모자들이 프랑스에 유학한 사르트르의 사상적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사르트르는 미처 알지 못했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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