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재선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5.14 10:17 |

글쓰기 원칙 중 하나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것을 지킨다. 극도로 철저하다. 글쓰기란 문제를 다루는 것이며, 다룬다는 것은 비판하거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뜻한다. 다루는 문제에 특정인이 포함된다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가령 특정인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이지 사람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종종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문제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사고틀이나 사고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다. 이밖에 다른 한 가지 원인도 있다.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모든 글쓰기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직설적인 스타일도 있고 비유나 풍자의 스타일도 있다.


스타일과 문제를 혼동해선 안 된다. 양자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문제가 사고내용에 해당된다면 스타일은 표현형식에 해당된다. 따라서 표현은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 오히려 표현이 자유로울 때 문제나 문제에 담긴 사고내용이 보다 심화, 확대될 수 있다. 표현에만 주목하면 문제를 인신공격이나 중상모략으로 혼동하는 착각에 빠진다.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동생시장을 비판해온 시장형님 이재선의 앞뒤 맞지 않는 행태에 대해 몇 차례 공개적인 비판을 수행했다. 그것은 한 치 오차도 없을 만큼 글쓰기 행위에 따른 책임을 걸어야 하는 이른바 '실명비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법률적 책임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비판받는 쪽, 정확하게는 비판에 대응하는 비판받는 쪽도 마찬가지다.


이 몇 차례에 걸친 공개적인 실명비판에 이재선은 마치 성전이라도 벌일듯이 반응하더니 그 반응은 불과 단 한 차례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이후에는 페이스북을 통해 이렇게저렇게 반응 중이다. 치열했던 단 한 차례의 반응은, 그러나 그 치열함과는 달리 그의 사고틀, 사고내용, 표현의 수준 정도를 한 눈에 알아보기에 충분했다.


그는 많이 부족했고 많이 어긋났다. 부족한 것은 죄가 아니다. 본디 사람은 부족한 법이기 때문이다.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소통한다. 그러나 어긋난 것은 죄다. 인식과는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비판에서 그에게 '책임'이라는 말을 상기시킨 이유다. 이후 그는 공개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페이스북 반응으로 대체했다.


비판의 생명력은 인식의 정당성이나 논리의 합리성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시간의 추이 속에서 보이는 일관성, 경우에 따라서는 심화, 확대가 인식의 정당성, 논리의 합리성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갖는다. 반대로 이런 시간의 추이 속에서는 한 때 정당성을 가졌던 인식이나 합리적인 논리가 일시적이거나 무늬만이었다는 것이 흔히 폭로되기도 한다.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은 가버린다."(레오 페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간의 힘, 나아가 역사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재선의 한 차례의 공개적인 반응과 페이스북을 통한 반응들이라는 극명한 대조는 이상하다. 이 한 가지 객관적인 사실만으로도 그의 한 차례의 치열했던 반응도, 이후 페이스북을 통한 반응들도 정당성, 합리성은 도전받는다.


"이거 글 안 쓰려고 했더니 아주 나쁘다. 중들의 도박 내용을 쓰면 그만인데 그 글을 쓰면서 왜 나가 생각난다고 할까. 이건 같은 각도로 놓으면서 나를 도박하는 중 수준으로 낮추어 보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그래서 마인황은 가증스럽다. 이상한 이론 가져와서 사람을 미친놈 취급한다. 정상적이 아니라고 한다."(이재선)


도전받는 그의 정당성과 합리성은 그의 어떤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용한 것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고스란히 옮겨온 것으로 사례적이다. 시간의 추이를 통해 말한 것이 통시적 비판이라면 이 경우에는 공시적 비판이 가능하다. "나를 도박하는 중 수준으로 낮추어 보도록 만드는 방법"이라니? 이것은 결코 제대로 된 인식이 아니다.


'내가 참회합니다'라는 글에서 끌어들인 일부 스님들의 도박사건은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이라는 문제를 다루기 위한 예화다. 이재선이 이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대체하는 것, 곧 "나를 도박하는 중 수준으로 낮추어 보도록 만드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를 사람으로 동일시한 탓이다. 제 멋대로 상상한 논리적 비약이다.


문제와 사람 간에 논리적인 인과관계란 있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이재선은 스스로 문제와 사람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것을 '잘못된 비교 레벨(misplaceed level)'의 오류라고 부른다. 그 결과, 그는 나에게 "가증스럽다"는 인신공격을 퍼붓고 만다. 때문에 그의 글은 비판이라는 말을 붙여주기도 어려울 만큼 저열하다.


이재선의 글은 기본적으로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구조의 특징이 어떤 의미작용을 일으키는지 예화로서 보여주련다. 말콤 엑스는 소년 시절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뛰어났다. 백인선생이 장래 희망을 묻자 그는 변호사라고 대답했다. 이 때 백인선생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깜둥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돼."(알렉스 헤일리,《말콤 엑스》)


"나를 도박하는 중 수준으로 낮추어 보도록 만드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이재선과 "넌 깜둥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돼"라고 말하는 백인선생 사이에는 과연 얼마만한 거리가 있는가? "이상한 이론 가져와서 사람을 미친놈 취급한다"고 말하는 이재선과 "넌 깜둥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돼"라고 말하는 백인선생 사이에는 과연 얼마만한 거리가 있는가?


"내 마음 속에 지칠 줄 모르게 바삐 돌아가는 언어의 기계는 일련의 형용사들을 배출해낸다. 나는 그 사람을 형용사로 뒤덮으며, 그 자질을 나열한다."(롤랑 바르트,《사랑의 단상》)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논리 같지 않은 논리를 구사해선 안 된다. 상상과 논리적 비약으로 자신을 위로해선 안 된다. 실명비판 앞에서는 특히 그렇다. 다시 남겨둔다.


'있는 그대로.'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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