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 다음은?  
마스터베이션 즐기는 언론(?)들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3.18 10:43 |

얼마나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을까? 성남피플뉴스는 그 보도행태로 봐서 야권연대로 성남시장에 당선된 이재명과 주사파인 성남민노당의 '로동신문'이란 느낌을 지을 수 없다. 이 땅의 자유언론을 능멸하는 특정정치세력의 기관지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성남피플뉴스의 남언호 기자가 15일 통합진보당 민주통합당 양당 지도부의 야권연대 협상결과에 따른 통합진보당 김미희, 전지현 두 후보의 용퇴를 '아름다운 용퇴'라고 보도했었다. 이런 보도에 "낯 뜨거워 못 보겠다"고 지적하며 그 이유를 밝혔다.


"이미 사퇴가 아닌 용퇴다. 양당 지도부의 야권연대 협상결과에 따르면 이미 그렇게 규정된 것이다. 굳이 사전적 의미를 따지지 않아도 용퇴는 사퇴를 미화하는 충분한 수식어구들이 포함된 말이다."(<성남피플뉴스의 '글장난'>)


이런 이유에서 보면 성남피플뉴스의 글장난은 일종의 '상표위조행위'인 셈이다. 이 성남판 로동신문 못지않은 보도행태를 보여온 성남투데이에서도 '유사' 상표위조행위가 있었다. 곽세영 기자가 같은 것을 다루면서 '아름다운 양보'라고 보도한 것이 그것이다.


상표위조행위에도 급수라는 게 있나 싶은 느낌을 받았다. 이후 어느 독자가 댓글을 통해 "성남피플뉴스와 성남투데이는 왜 아름다운 양보라고 보도할까요?"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아름다운 용퇴'든 '아름다운 양보'든 다 상표위조행위로 봤기 때문이다.


이 독자의 의문은 가치가 있다. 성남피플뉴스나 성남투데이가 로동신문 같다는 답만으로 해소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이 답도 증거적 사실들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보다는 '본질적인 이유'를 지닌 답이 있을 것 같아서다.


문제가 된 '용퇴'라는 말을 사례로 생각해보고 싶다. 용퇴라는 말은 이미 밝혔듯이 그 이상의 의미는 물론 가치를 나타낼 수 없는, 사퇴라는 낱말 중 최고다. 기자가 이런 용퇴라는 말을 모를 리 절대 없다. 기자란 자기가 사용하는 말에 책임지는 자이니까.


그런데도 용퇴 앞에 '아름다운'이란 수식어구를 붙여 형용모순을 일으키는 무리를 일으킨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어떠한 사실도 확실하게 관찰하지 않는 자에게는 자기가 사용하는 낱말(또는 표현, 문장)의 의미도 확실하게 존재할 수 없다."(《확실성에 대하여》)


그가 말한 그대로다. 사실을 확실하게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본질적인 이유에서 그가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 기자! 기자라는 사회적 소임을 맡은 자가! 그러니 그런 자를 어찌 기자라 할 수 있으랴!


기자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관찰에서 시작하는 자'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회적 사실'에 대한 확실한 관찰에서 시작하는 자다. 여기에서 시작하지 않는 기자는 다 가짜다. 사이비다. 종종 특정정치세력의 개다.


사회적 사실에 대한 관찰이 방해받는 것은 사고가 뒤틀렸기 때문이다. 그 '뒤틀린 사고'는 확실하게 관찰된 사회적 사실로부터 가능한 해석을 도출하는 '인식력'과는 전혀 다르다. 뒤틀린 사고에 포착된 사실은 이미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사실에 대한 확실한 관찰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 뒤틀린 사고로 가능한 해석의 출발인 그 관찰을 포기한다는 것, 이것이 어느 독자가 제기한 의문에 한 가지 가능한 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에는 중요한 함의도 있다.


그것은 그가 한 말의 전제, 즉 드러나지 않은 전제이기도 한데, 곧 '말의 의미가 사용을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사용이 의미를 확정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이것을 "어떤 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것의 사용"(《철학적 탐구》)이라는 명제로 표현했다.


어떤 말의 의미가 타자에게 인정되는 경우, 오직 이 경우에만 사람들은 언어 사용의 규칙을 따르게 된다는 의미다. 곧 제 멋대로 사용하는 말이 결코 사회적 언어일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럼 반대로 제 멋대로 말을 사용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 오른손은 내 왼손에 돈을 건네 줄 수 있다. 내 오른손은 증여증서를 쓰고, 내 왼손은 수령증을 쓸 수 있다."(같은 책) 가령 '증여'라는 말의 이런 식 사용에 대해 저널리즘은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언제까지 마스터베이션?"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래? 그런데 그 다음은?"(같은 책)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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