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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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타임즈 | 2012.03.10 16:49 |

누군가에게 '양심이 없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상대는 윤리적으로 경멸당한 것이다. 반대로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윤리적 주체'로서 정립된다. 양심은 '윤리적 자각'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윤리적 자각이란 자기를 타자 삼을 때 솟구친다.


흔한 말로 나를 '너'로 삼을 때다. 그래야 나를 너로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도 알 수 없고 신도 어찌할 수 없는 타자가 너다. 그러한 너에게 물어 나의 행위의 선악을 묻는 것이다. 이것이 윤리적 자각이다. 윤리적 자각은 인간만이 가능하다.


동물은 자연과 밀착되어 있어서 나를 너로 삼지도 너로 대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너로 삼지도 너로 대하지도 못하는 인간들, 동물적인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열등한 인간들이다. 그들이 바로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나를 너로 삼아 너로 대하는 능력이 '양심'이다. 칸트는 양심을 '법정'에 비유했다. 법정의 비유는 재판관과 제소된 자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 관계에는 엄정한 무엇이 있다. 그렇다면 '엄정한 무엇이 양심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양심은 또 다른 자기인 너를 거울로 삼아 자기인 나가 비쳐지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또 다른 자기를 너로 삼고 그 너라는 재판관 앞에 자기를 제소된 나로 삼아 심판하는 능동적인 행위다. 윤리적인 인간만이 가능한 행위다.


흔히 '양심의 가책'이라 한다. 이는 양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가책이란 '죄의식의 느낌'이기 때문이다. 양심은 나에 대한 엄정함을 추구하는 능동적인 능력이기에 밝고 환한 느낌을 수반한다. 결코 가책과 같은 어둡고 침울한 느낌을 수반하지 않는다.


양심이면 양심이지 양심의 가책일 수 없다. 사실 양심에 가책이 따라붙는 것은 종교, 특히 기독교의 영향이 크다. 기독교는 원죄로부터 가책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적이라 불리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민주통합당 중원구 모 예비후보의 금권선거 의혹을 한 시민이 폭로했다. 관련 기사에 따르면 이 폭로는 '양심의 가책'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어찌 양심의 가책일 수 있을까. 양심일 것이다. 나에 대한 엄정함을 추구하는 능동적 능력의 산물일 것이다.


그것은 양심의 산물이기에 밝고 환한 일이다. 박수 받을 일이다. 어둡고 침울한 일에 박수칠 리 없지 않은가. 반드시 죄값을 치르게 한다는 소임을 맡은 수사당국이 신이 나고, 돈으로 표를 사려는 자를 밝혀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믿는 시민들이 신이 나는 일이다.


양심, 그것은 나를 너로 삼아 나를 너에게 보내는 일이다. 너에게서 나에게 엄정한 무언가가 되돌아오는 일이다.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 유명한 칸트의 윤리법칙이다. 이 윤리법칙도 실은 너에게 나를 보내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칸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너로 하여라!' 그것은 이런 말이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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