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과 CCTV  
'CCTV란 사물이 정치에 나서면 정치를 소거시킨다'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1.12.27 10:04 |

만약 어떤 나라의 대통령이 집무실에 'CCTV'를 설치하고 '청렴'을 말했다면, 국제사회는  그 나라를 어떻게 취급하게 될까? 볼 것도 없다. '후진국' 취급당한다. CCTV 설치는 국제적인 조롱거리가 된다.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전에 이재명 성남시장이 시장실에 CCTV를 설치하고 청렴을 말하면서 일부 언론에 자랑한 일이 있었다. 그 때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이 어처구니없는 자랑에 정곡을 찔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청렴은 CCTV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 시장의 과시는 '도착적인'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신경증환자가 고소공포증이 있을 때 그는 높은 곳이기 때문에 공포를 느낀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높은 곳이 고소공포증의 원인이 아니다. '증상'으로 나타난 리비도의 억압, 즉 신경증환자 자신의 마음에 원인이 있다.

 

이 한심한 CCTV 소리가 또 다시 이 시장으로부터 나왔다. 시장 수행비서로부터 폭언과 욕설을 들었다는 한나라당 이덕수 의원의 주장에 대해 그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그것이 CCTV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시장은 CCTV를 너무도 사랑하는 듯하다.

 

그런데 손발이 영 안 맞는다. '입'으로 나선 공보담당관이 일방적으로 질의․응답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기자회견이야?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백번 낫다. 시켜서 마지못해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령(令)'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옳은 데 잘 쓰겠다던 권력을 도구화한 사례로도 보인다.

 

이덕수 의원은 지금 주목을 받고 있다. 게다가 이 주목의 한 가지 형태는 그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 측에선 미워도 그렇게 미울 수 없는 '미운 오리새끼'처럼 보이고 있다는 점에 있다. 공보담당관이 '낭송한' 기자회견문은 '해결의 정신'은커녕 '증오의 정신'이 지배한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그가, 그와 행동을 같이 하는 한나라당이 의회에, 시민사회에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 '과장'조차 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스스로 정당성을 훼손시키는 거짓말이나 과장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동의하지 않는 측에선 예측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설령 예측일지라도 이런 생각은 인간이나 집단, 사회에 대한 '기초적인 신뢰'를 전제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고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폄하하려 해도 이런 생각이 현실원칙적임을 누가 부정하랴.

 

이 시장이 CCTV 소리를 다시 꺼내든 것은 이 기초적인 신뢰조차, 따라서 모두의 앎이자 행위 척도인 '상식'조차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놀랍다! 의회 부정의 심리 또는 의회가 어떻게 나오든 자기 합리화만 챙기면 된다는 심리가 아니고선 달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심리를 문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납득하기 힘든 심리는 그의 도착적인 행위와 직결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도착을 도착으로 보지 못하는 그의 지지세력, 또는 도착이 버젓이 통용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련의 정치적 흐름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거울에 황금을 비춰보자. 황금빛이 나온다. 그 빛은 황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울 자체가 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반사된 빛에 불과하다. 즉 '외견상'일 뿐이다.  황금이 거울 앞에 놓이지 않으면 거울이 빛을 발할 리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을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외견'이 아닌 '본질'에서 파악해 상품의 비밀을 풀었다. 외견상 거울이 황금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이듯 상품을 대하는 인간들에게서 나타나는 도착증상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상품의 페티시즘(fetishism)'다.

 

즉 그는 상품의 가치가 인간의 노동에 의해 생산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원래부터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도착증상을 폭로했던 것이다. 그는 또 상품의 페티시즘에서 기인한 '화폐의 페티시즘'도 밝히면서 명언을 남겼다.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된다고 믿고 있다."(마르크스, 『자본론』)

 

이것은 마치 왕(화폐)이 왕인 이유가 신하(상품)가 왕에 대해서 신하로서 행동하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외견상' 왕이 왕이기 때문에 신하가 신하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요컨대 신하가 없으면 왕은 이미 왕일 수 없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생활에서 다양한 페티시즘, 즉 성 도착증들을 보여준 바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성 도착증들을 '성욕의 대상이 바뀐 경우'와 '성욕의 목표가 바뀐 경우'로 구분하기도 했다. 그는 성 도착증들이 "우리의 미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품의 페티시즘은 상품을 만든 인간의 노동을 은폐한다. 화폐의 페티시즘은 화폐가 '상품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상품의 주인'인양 착시를 일으킨다. 성생활의 페티시즘은 그 은폐만큼이나 인간의 성생활을 혼란스럽고 문란하게 만든다.

 

CCTV라는 일개 사물이 정치 전면에 나서는 것은 정치에서 행위주체인 정치인을 소거시킨다. 그런 정치가 '책임정치'일 리 만무하다. 아니 '정상정치'일 리 만무하다. 그것은 정치를 사물로 오인하는 정치적 도착증이 아니고는 달리 설명될 수 없다.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인간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없다. 때론 다투고 때론 협상하는 인간, 그런 정치인 없는 정치를 생각할 수 없다. 정치를 희화화하는 CCTV 소리 따위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정치인 없는 '정치의 페티시즘'은 당장 사라져야 한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이렇게 배웠다. '똑똑한 사람'이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대로 말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눈앞의 사람을 소거하고 CCTV를 들이대는 자는 '바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바보를 바보로 보지 못하는 자들 역시 바보일 것이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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