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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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타임즈 | 2012.02.06 10:37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시인 정현종이 쓴 '섬'이라는 시다. 널리 회자되는 시다. 각자의 느낌이나 이해가 있을 것이지만, 대개 사람들은 '섬'이라는 이미지에 쏠려 있는 듯하다. 그리고 섬은 두 문장 중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보다는 '가고 싶은 그 섬'에 방점이 찍히고 어느 새 섬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과 무관하게 '가고 싶은 그 섬'만 간직된다.

 

이 때문인지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문장을 직간접적으로 이용한 영화 뿐 아니라 책도 많이 나왔다. 이 경우 섬은 '고립'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정현종이 쓴 섬은 고립이 아닌 '사이'라는 이미지에 그친다. 시인이 시인인 것은 상투적인 이미지를 혁신하는데 있다. 고립의 이미지를 사이의 이미지로 바꾼 정현종의 시가 가슴을 울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 구절로 구성된 정현종의 시는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하이쿠(반면 하이쿠처럼 같은 정형시이지만 시조는 세계가 알지 못한다)를 연상시킨다. 하이쿠는 5, 7, 5자의 3구 17자로 쓰인 시다. 3구를 한 줄로 배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한 줄로 된 정형시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 틀리지 않다. 하이쿠에 대해 롤랑 바르트는 이런 말을 한다.

 

"<새벽 네 시에/아홉번이나 깨어/달을 사랑해.> 의미를 해석한다는 것은 서양에서는 의미를 꿰뚫는 것, 다시 말하면 의미 속으로 쳐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하이쿠에서는 이러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이쿠에서 읽는 노동이란 언어를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단 중지시키는 것이다."(《기호의 제국》)

 

바르트가 말한 것은 정현종이 쓴 시에도 들어맞는다. 특히 단서가 되는 '사이'라는 낱말이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든다. 나에 대해 누군가가 있다. 역으로 누군가에 대해 나가 있다. 사이는 나와 타자의 존재방식이다. 그것은 굳이 말한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공'과 같다. 아무 것도 없는데 언어가 필요할 리 만무하다. 바르트가 말한 '언어의 중지'다.

 

사이가 없다면 나도 없고 타자도 없다. 정현종은 그것을 섬으로 상징한 것이다. 그런데 정현종은 '그 섬에 가고 싶다'고 씀으로써 섬으로 상징한 나와 타자의 사이를 뛰어넘으려 한다. 다리가 없으면 강을 건널 수 없다. 배가 없으면 강을 건널 수 없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뛰어넘을 수밖에 없다! 이것을 '도약'이라 한다. 사이에선 오로지 도약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정현종은 도약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의 시는 그 이전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시를 빌어 사이의 문제를 도약의 문제로 이동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사이의 문제를 그저 언어의 중단과 같은 사이의 문제로만 보았다면 마르크스나 크립키 같은 사람은 사이의 문제를 도약의 문제로 이동시켜 사고했다.

 

이동의 관점에서 도약은 오직 나에 대한 타자를 상정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타자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타자에 이르는 길은 도약 밖에는 없다. 정현종은 '그 섬에 가고 싶다'고 썼다. 사이는 어떻게 극복되는가? 그 섬에는 어떻게 갈 수 있는가? 그 섬에 가려면 도약 밖에 없다. 도약이 없다면 타자도 없다.

 

성남데일리의 추용선이 이상호, 김태년의 공동선거여론조사 상호제안을 놓고 어느 쪽이든 응하지 않는 쪽은 '정치적 신뢰'를 잃는다고 썼다. 거기엔 정치인의 타자인 유권자가 없다. 유권자의 입장에선 '그들만의 게임'이 분명한데도. 정치인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기자? 발행인·편집인이기도 한 그는 독자가 개입할 '사이'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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