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시장에게 시장 형님이  
이재선의 이재명 비판, 어떻게 볼까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2.20 14:09 |

이재선의 글이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동생 시장을 질타한 시장 형님의 글이기 때문이다. 동생 시장을 질타했음에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동생 시장이 자기의 길을 간다면 시장 형님도 자기의 길을 간다고 다짐하는 내용도 있기 때문이다.

 

희유한 일이다. 동생 시장과 시장 형님 사이에서 질타란 무엇이며, 반응이 없었다는 것은 무엇이며, 자기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형/제관계란 무엇인지 물어져야 할 것 같다. 문득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경구가 떠오른다.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인생의 비극 제1막은 부/자가 되었다는 데서 시작한다."(《侏儒の言葉》) 자식이 답례할지 안(못) 할지도 모른 채 부모는 무한히 증여한다. 자식은 다 갚을 수가 없다. 무한히 증여받았기 때문이다. 자식은 무덤 속에 들어가는 날까지 채무의 감정을 지울 수 없다.

 

증여/답례관계의 비대칭성. 이것이 부/자가 비극인 이유다. 아쿠타가와는 이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부모의 무한 증여가 자식을 폭군이나 약자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증여/답례관계의 비대칭성은 인류학과 경제인류학을 참조한 것이다.

 

이 때문일까? 전에 무의식중에 큰놈에게 이런 말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이 세상에 부모가 없는 날은 온다. 누가 동생을 돌봐주겠니?" 이처럼 증여와 답례, 그 관계의 비대칭성은 '세대'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부/자관계, 형/제·자/매·남/매관계에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거세대 없는 현재세대란 있을 수 없고, 현재세대 없는 미래세대 역시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세대는 과거세대로부터 형언하기 힘든 빚을 지고 있다. 엄청난 것이다. 미래세대 역시 현재세대로부터 그런 빚을 지게 될 것이다.

 

세대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증여/답례, 그 관계의 비대칭성은 점차 가족으로 좁아지는 것 같다. 부/자관계로 좁아지는 것 같다. 심지어 그마저 흔들리는 경우도 흔치 않게 본다. 그만큼 쿨한 상품교환관계가 세대에 침투, 확장되어 증여/답례관계를 대체중이다.

 

동생 시장에 대한 시장 형님의 질타는 증여/답례관계에서 나온 것으로 읽힌다. 물론 형제관계를 소거시키고 시민/시장관계에서 나온 질타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남다른 그의 비판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다. 이재선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  그 피로 시장 형님은 동생 시장을 질타하는 것이다. 그의 질타가 세인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고, 다른 어떤 질타보다 빛을 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장 형님이라면 질타는커녕 이익 또는 손실이 일반적인 사례다. 여기서 일반적인 사례란 동생 시장에 기대어 시장 형님이 뭔가 챙기려 하거나 반대로 이러저런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시장 형님의 질타는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런데 동생 시장은 반응이 없었다? 더욱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만 해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렇다면 동생 시장은 시장 형님에게 전혀 답례하고 있지 않다. 부/자관계에서 불효자는 울 수밖에 없다.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형/제관계도 마찬가지다.

 

시장 형님이 자기의 길을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해진다. 동생 시장을 향한 무한 증여, 그것이다. 그것이 질타의 반복 또는 고양임은 물론이다. 인생의 비극 제1막은 부/자관계다. 그렇다면 동생 시장의 인생의 비극 제2막은 형/제관계다.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희극은 웃긴다. 그저 그만이다. 그러나 비극은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다. 지워지지 않는다. 이런 비극적인 형제관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동생 시장이 시장 형님의 질타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형제의 비극은 극치를 달린다.

 

한 가지가 남았다. 동생 시장에 대한 시장 형님의 질타가 희유한 비극이라면 그 비극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것이다. 시장 형님의 이런저런 질타 속에는 정신이랄까 뭔가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동생 시장에게나 시민들에게나 이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 질타는 지방자치를 염두에 두고 한 지역사회에서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취지를 안고 있다. 분명하다. 때문에 그 질타는 공동선 추구의 책임을 떠맡은 자의 책임 수행에서 방법에 관한 것이다. 그의 글에서 《대학(大學)》을 읽는 느낌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학은 공동선 추구에서 책임을 맡은 자가 그것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것은 흔히 3강령과 8조목으로 말해진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을 살펴볼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아니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3강령과 8조목을 통해서 대학이 말하려는 것이다. 자구주의자들은 그것을 흔히 인격수양이라고 말한다. 3강령과 8조목의 겉만을 취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숨겨진 그것은 이것일 것이다. 틀림없이 시장 형님이 동생 시장에게 무한 증여하려는 것이리라.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毋自欺)'(《大學)》) /마인황 칼럼니스트

Copyrights © 2006 www.sntimes.kr All Rights Reserved
공감 비공감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