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아론자  
이삼경의 '줄줄이 알사탕 같은 후보들'을 읽고서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2.14 11:44 |

"국회의원 예비후보들이 민주통합당에 쏠리는 현상을 빚고 있다. 지난 총선 때는 한나라당에 쏠리더니 정반대 양상이다. 뭘 의미할까? 유권자보다는 권력을 우선시하는 후진적 정치행태! 야권이 총선에 승리한다 해도 기대할 것이 없다. 밑도 끝도 없는 무능! 소름끼친다. 후보가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정당이나 그렇지 않은 정당이나 쓸 만한 재목은 없고."

 

"수정구의 많은 야권후보들 중 차별화 정책을 제시하는 후보가 몇 명이나 있는가. 혹독하게 자신을 연마한 후보가 몇 명이나 있는가. 그들은 천편일률적인 줄줄이 알사탕 같다.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내보이며 너도 나도 1등이라고 외치는 건 그들 스스로 어떤 부류의 정치인인지 적나라하게 입증한다. 상대후보를 죽여야 할 적으로 치부하고 마는 것이다."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성남투데이의 이삼경이 '줄줄이 알사탕 같은 후보들'이란 글에서 쓴 것이다. 이것을 보고 떠오른 낱말이 있다. '환멸'. 이 낱말보다 그의 글을 더 잘 말해줄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는 환멸하는 법이 없다. 설령 세상 돌아가는 꼴이 글러먹었다 해도 환멸하지 않는다. 왜 환멸하는 것일까? 애당초 세상에 환상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환상을 가졌었기 때문에 그 환상이 깨지면 환멸하는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최고의 문화를 자부하던 유럽인들은 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환멸을 느꼈다. 이삼경의 글은 그것을 연상시킨다. 지난 세기의 역사에서 풍부한 사례를 보듯이 기독교도나 인텔리가 좌익이 되고, 좌익이 우익이 되는 것과도 같다. 환상을 품었고 환멸했기 때문이다.

 

환상과 환멸은 동의어다. 왜 환상하고 환멸하는가? 모든 것을 나의 의식 안에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를 '독아론(獨我論, solipsism)'이라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의 의식 안이라면 그의 의식은 신적이다.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것이다. 그 신적인 것을 '코기토'(데카르트)니 '순수자아'(후설)니 '지각'(버클리)이니 달리 불러도 마찬가지다.

 

코기토니 순수자아니 지각이니 하는 것을 열거하는 이유가 있다. 신적인 시점(視点)을 가진 자에게 "네가 신이냐?"고 들이댔을 때, 그는 "나는 인간이다"라고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믿을 수 없는 반응이다. 이 반응은 나의 의식이 내가 속한 관계나 체계의 결과라는 소리인데, 실은 이것도 나의 의식으로만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아론자가 쓰는 글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세계를 '표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가령 환상으로, 환멸로 표상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필생의 논적으로 삼았던 것이 이 독아론이다. "표상하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논리철학 논고》) "나의 문제는 러셀의 논리학을 외부로부터 공격하는 것이다."(《수학의 기초》)

 

독아론이 허구인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나의 의식이 침투할 수 없는 '외부'가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나의 '의식 밖', 신도 어찌할 수 없는 '타자'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노무현의 죽음을 파는 자들이 있다. 업적이 어떻고 유지가 어떻다며 그를 팔아 정치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은 자는 산 자의 타자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말한 것은 이삼경의 글이 환멸에 기초한다는 가설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정말 환멸인지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 똑같은 것은 없다. 내 앞에 주어진 것들이 어떻게 표상되든 거기에는 그 표상과 상관없는 차이들이 있다. 니체 식으로 말한다면 동등하지 않은 것들을 등치시킬 때 표상이 발생하며, 그 표상은 실은 '나의 의식'일 뿐이다.

 

수정구 민주통합당 예비후보들 중 한나라당과 인연 있는 사람은 장영하, 임정복 두 사람 밖에 없다. 다른 여섯 사람은 민주통합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대로 수정구 한나라당의 경우 현역의원이 건재하다. 누가 쉽게 공천경쟁에 뛰어들겠는가. 그렇다면 '쏠림'이라는 표상의 근거가 그가 말한 대로 '권력 우선'이라는 것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

 

김태년이 발표한 정책을 판단은 해보았는가. 자신을 연마했는지 안 했는지, 했으면 얼마나 했고 안 했으면 얼마나 안했는지 구체적으로 예비후보들의 언행을 놓고 따져보았는가. 일부 예비후보들의 1등 자랑을 다른 예비후보들을 죽여야 할 적이라는 의미로 환원할 수 있는가. 구체적인 분석, 판단 없이 싸잡아서 '줄줄이 알사탕'이라고 예단할 수 있는가.

 

이삼경의 표상이 환멸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이삼경이 환상을 가진 자라면 반대로 모든 예비후보들을 싸잡아서 '줄줄이 명품케익'이라 예단할 것인가.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언뜻 인신공격으로 보이는 비유나 풍자도 근거가 있는 한 수사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이삼경의 주장은 구체적인 분석, 판단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신공격에 가깝다.

 

싸잡아서 칭찬하는 만큼이나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차이, 설령 그 차이가 아무리 미세할지라도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과 대적하지 않는 자는 사유하고 글쓰는 자로서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실로 사유와 글쓰기는 이 미세한 차이를 발견하려는 수고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위대한 책, 빼어난 글의 탄생 비결은 여기에 있다.

 

안고는 이런 것을 썼다. "짧고 굽은 다리에 바지를 껴입고서 양복을 걸치고 잰걸음으로 걸어 다니고, 댄스를 추고, 다다미를 버리고 싸구려 쇼파에 상체를 뒤로 젖히고 앉아 멋있는 척한다. 그것이 서양사람 눈에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게 보이는 것과 우리 스스로 그 편리함에 만족스러워한다는 사실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坂口安吾, 〈日本文化私觀〉)

 

언론에서 글쓰기는 공론을 다룬다. 거기에는 일정한 객관적 기준을 요구받는다. 그것은 나의 기준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너의 기준인 동시에 나의 기준이다. 이삼경이 쓴 것은 다음과 똑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 집은 가난하다. 아빠도 가난하고 엄마도 가난하고 운전기사도 가난하고 파출부도 가난하고 경호원도 가난하고……."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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