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진보주의자'다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3.05 09:43 |

최근 쓴 '국회의원 되고 싶어요?'라는 글(기획기사)에 '아까워'라는 '녀석'('잠시 웃자'고 만든 조어다)이 "조중동에 글 올려!"라고 응답했다. 내 글이 조중동 글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선문답'을 즐기는 도사인가 싶은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녀석의 응답이 '악담'이라는 것이다. 녀석에게 조중동이란 가령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민중의 소리'에 대한' 조중동이기 때문이다. 그런 조중동이라면 녀석에게 악일 테고, 악으로서의 조중동이라면 녀석의 응답은 악담임에 틀림없다.


녀석은 왜 악담을 퍼붓는 것일까? 여기엔 두 가지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첫째, 녀석이 언론을 보는 시각이 '이념으로서의 보수 대 진보'라는 점이다. 둘째, 내 글을 전혀 근거도 없이 이념으로서의 보수에 처박아 버린다는 점이다. 묶어서 음미해보자.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에서 '현실에 근거한 진보'와 '교조적 요구를 지닌 진보'를 구분한다. 후자를 '이념으로서의 진보'라고 하자. 후자는 교조적이다. 가령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벤야민의 구분은 보수에도 적용할 수 있다.


요구가 현실에 근거하는 한 보수도, 진보도 다 필요하다. 반대로 요구가 교조에 근거하는 한 보수도, 진보도 다 필요 없다. 전자는 종종 절실하며 후자는 전혀 쓸모가 없다. "차라리 목을 쳐라, 상투는 못 자른다"는 선비들이 있었다. 상투는 '효'의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무상한 세상의 변전에도 지켜야 할 것을 지켜야 할 때가 있다. 이 때 필요한 태도는 보수다. 따개비 같은 세상의 고착화에도 바뀌어야 할 것을 바꿔야 할 때가 있다. 이 때 필요한 태도는 진보다. 현실에 근거한 보수든 진보든 양자 사이에 우열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현실을 초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종교로부터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수가 종교에 귀의해 있다. 나이 먹으면 종교로 귀의하는 수도 많다.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인간이 현실을 관념으로 대체하는 정신의 질병을 앓고 있다.


바로 여기에 현실에 근거한 보수가 교조로서의 보수, 이념으로서의 보수로 고착화되는 이유가 있다. 현실에 근거한 진보가 교조로서의 진보, 이념으로서의 진보로 고착화되는 이유가 있다. 이런 의미에선 현실에 근거한 보수도, 진보도 부족하다.


오히려 현실에 근거한 보수도, 진보도 아예 머릿속에서 말끔히 청소해버리고 다만 때와 장소에 따른 맞춤의 요구에 따라 태도를 자유롭게 이동시키는 것이 중요하리라. 이동적 태도만이 고착화되기 쉬운 현실의 근거한 보수로부터도, 진보로부터도 자유롭다.


이동적 태도가 하물며 이념으로서의 보수나 진보 따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껏 말한 것이 내가 사고하고 글을 쓰는 원칙 중 하나다. 녀석은 내게 조중동에 글 올리라고 악담했다. 자, 내 사고와 글에서 조중동의 냄새를 맡아보시라. 냄새가 나나?


이동적 태도는 언론보는 법을 규정한다. 내게는 조중동이나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민중의 소리나 다 읽힌다. 반대로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민중의 소리에 대해 조중동을 말하는 녀석에게는 조중동이 읽혀지지 않을 것이다. 혼식과 편식, 소화력과 체증의 차이다.


그러나 언론을 보는 잣대로서 '이념으로서의 보수 대 진보'가 무용하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여전히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정치신앙'이란 사실을 무시하진 않는다. 대신 나는 그것으로 해소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무수한 지점을 즐기며 통과한다.


조중동이 전혀 읽혀지지 않는 녀석에게는 조중동 독자가 이 나라 언론 독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는 현실이 완전히 방기되고 만다. 이 현실을 관심과 이해 밖에 두는 녀석이 아무리 진보를 내세워봤자다. 그것은 고작 자기 몸을 달구는 마스터베이션이기 때문이다.


보수든 진보든 이념에 절대적으로 휘둘리는 만큼 상상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따라서 이념적 언어에 절대적으로 휘둘린다. 자칭 보수주의자들, 진보주의자들의 두드러진 표징이다. 예컨대 이재명과 그 언저리, 구민노당, 성남투데이, 성남피플뉴스의 언어가 그렇다.


소쉬르 등장 이후 언어를 '의미'로 보는 고정관념이 깨진 지 오래다. 소쉬르가 언어를 '가치'로 보았을 때, 그것은 한 언어에 대한 다른 언어를 상정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언어에는 차이밖에 없다'(《일반언어학강의》)는 언어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다.


비트겐슈타인도 사전에 의미로서 통용되는 언어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말을 모르는 사람, 가령 외국인은 누군가로부터 "석판 가져와!"라는 명령을 반복해서 들어도 자기나라 말로는 어쩐지 건재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 같다고 생각할지 모른다.'(《철학적 탐구》)


'비국교도'라는 말이 있다. 여기엔 자신들의 신앙이 수많은 대중의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일치를 이룬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비진보주의자다. 반진보주의자다. 냉혹하다. 짜샤, 그래서 어쩔래? 보수주의자로, 보수반동으로 팰래?


한국 근현대사의 한 가지 중대한 교훈이 있다. 1980년대는 해방 전후 시기의 반복이고, 해방 전후 시기는 1920년대의 반복이고, 반복될 때마다 소극(笑劇)이 나타났다고, 여전히 그 '쩐' 소극의 무대에서 낄낄거리는 녀석들이 있다고. 소극? 좌익의 소극!


공산당 일당독재, 수령독재만이 좌익이 아니다. 그것을 포기했다 해서 좌익이 아닌 것이 아니다. 오늘날 '복지론'으로 무장한 사회민주주의가 좌익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사회민주주의의 뿌리는 의연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던가!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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