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나의 의식으로 무언가를 볼 수 있다?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5.09 10:11 |

지난 6일 '나는 예외?'라는 칼럼을 썼다. 성남시장 이재명의 형인 이재선의 어떤 행태에 관한 것이다. 그 칼럼에 그는 헤아릴 수 없는 리플들을 통해 온갖 소리를 다 늘어놓았다. 독자들은 시장형님의 전모는 아닐지라도 한 가지 면모는 보았을 것이다.


시비를 떠나 이재선은 그 칼럼에 무슨 소리든 해도 좋다. 아니 무슨 소리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에 따른 책임은 이재선의 몫이다. 행위에 따른 책임은 윤리의 기본법칙이기 때문이다. 좋은 소리를 했다면 칭찬을, 나쁜 소리를 했다면 비난이 뒤따를 것이다.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그러나 칭찬이든 비난이든 다수의 독자들은 표는 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살이의 이치다. 그가 어떤 소리를 했느냐는 전혀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에겐 가치가 있을 그의 생각이며, 그것에 이미 독자들은 나름대로 판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관심거리는 그의 독특한 어떤 태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그가 한 온갖 소리들에 관통하고 있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독특한 어떤 태도가 집중되어 나타나는 것은 그가  독자들의 의견들을 이중적으로 상대한다는 사실에서다.


자신이 상정하는 사람들이 익명 뒤에 숨어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 쓴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주 그렇게 주장했다. 이런 독특한 태도를 불교에선 '관심(觀心)'이라고 한다. 대상에 자신의 의식을 투사하는 인식방법이다.


철학에서는 이런 태도를 '독아론(獨我論, Solipsism)'이라고 비판한다. 독아론자는 "모든 것은 나의 의식 안에 존재한다"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아론자에게는 주관과 객관의 분리도 문제되지 않는다. 나의 의식을 통해서만 객관을 보려 하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관계의 언어학, 즉 공시언어학이 비판받는 핵심도 여기에 있다. 독아론이 겉으론 '불패의 논리' 같지만 실은 자기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철학은 이미 폭로한 바 있다. 그것을 정교하게 말한 이들이 키에르케고르,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등이다.


나는 타자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신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타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이재선을 전혀 알지 못한다. 곽효선도 알지 못한다. 내 새끼들도 전혀 알지 못한다. 누구도 타자에 대해 함부로 말해서도 대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교에서는 관심을 엄하게 금지한다. 선불교에서는 특히 그렇다. 결코 터럭만큼도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식을 투사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혜능스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했다. "관심은 허망하다. 허깨비와 같아 볼 바가 없다."(《육조단경》)


선불교에선 '참구(參究)'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인다. 특히 '화두공부'할 때 쓰는 말이다. 오래 전 스님에게서 화두(話頭)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스님은 참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화두삼매(話頭三昧)에 빠지라." 화두가 나와 하나가 되라는 말이다.


관심하는 사람은 이 말을 알 수가 없다. 인식의 문제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 전 도올 김용옥이 EBS에서 화두를 풀이하다가 몇 해 전 입적하신 법정스님으로부터 한 소리 듣고 도중하차했던 일도 이와 관련이 있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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