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은 인식보다 만연한다  
느낌, 인식보다 더 인식적일 수 있다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4.30 07:07 |

인식과 느낌은 다른 것 같다. 아니 다르다. 어떤 점에서? 인식은 인식한 만큼 말로 표현할 수 있음에 반해 느낌은 느낀 만큼 말로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느낌을 나타내는 어휘들이 인식을 나타내는 어휘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느낌을 나타내는 어휘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해서 느낌이 인식에 비해 열등하다고 속단할 수 없다. 참혹한 전쟁의 참상 앞에 내던져진 누군가로부터 터져 나오는 분노의 절규나 슬픔의 눈물은 백 마디의 말로 표현되는 인식보다 더 인식적일 수 있다.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삶의 경험에서 볼 때 느낌은 말로 잘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인식보다 훨씬 더 암묵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만연한다. 이것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런 느낌에 대한 의미있는 고찰은 흔치 않다. 전통적인 이성 중심의 사고에선 주변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대받아온 느낌을 정면 대결한 깊이 있는 고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후반기에 나타난 세계관의 철학이나 20세기를 풍미한 실존철학을 경유하게 되면 느낌이 인식과 대등하다 또는 인식보다 우월하다는 생각도 지녀봄 직하다.

 

세계관의 철학자 딜타이는 하나의 삶의 상황을 지배하는 근본태도인 세계관이란 인식과 느낌이 의지에 의해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서는 어떤 주어진 상황이나 대상은 인식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오히려 느낌을 통한 체험, 음미, 향유가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느낌에서 보는 삶과 세계의 관계와 인식에서 보는 정신과 세계의 관계를 구분한다. 그는 전자를 후자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느낌은 인식의 촉진과 관련해선 행복으로, 인식의 저지와 관련해선 압박으로 세계를 맞닥뜨리게 하기 때문이다.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딜타이를 이어받으면서도 보다 근본적인 고찰을 수행한다. 그것이 바로 《존재와 시간》,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등을 중심으로 펼쳐진 그의 기분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기분은 단순한 심리 상태가 아닌 인간의 실존적 본질을 나타낸다.

 

"현존재는 그때마다 이미 항상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 "기분에서 현존재는 모든 인식과 의지에 앞서 열어 밝혀져 있다." "현존재는 기분에 사로잡힌 처해 있음으로서 언제나 이미 자신을 발견한다." "기분들은 현존재의 거기 있음의 근본방식이다."(《존재와 시간》)

 

이런 고찰들을 수용할 경우 느낌을 단지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정신의 풍경으로 치부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느낌은 인식을 통한 어떤 객관적인 것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느낌은 내게 주어진 상황, 대상의 가시적인 형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느낌의 사고를 펼쳐 보이는 것은 최근 수도권타임즈에 실린 일련의 글이나 기사를 둘러싼 리플들에 대한 좋지 않은 느낌 때문이다. 글이나 기사를 전개하는 어떤 인식의 옳고 그름을 문제삼는 생산적인 논쟁이 불현듯 인신공격으로 변질되곤 한다는 것이다.

 

그 느낌은 리플들이 인신공격이 아닌 나름대로의 인식력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매우 강렬하다. 왜 논쟁을 제기하거나 이끌어가는 인식력이 치졸한 인신공격으로 변질되는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거기에서 바닥이 드러난 어떤 감수성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감수성이란 본래 예민한 것이다. 그 감수성을 어떻게 하든 구실을 붙이는 인식으로 대체하는 것은 역으로 '감수성의 결여'라는 증명에 불과하다. 처음부터 인신공격으로 시작했다면 그냥 지나쳐도 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변질시킨 그의 삶의 문제가 된다.

 

느낌의 사고에 따르면 느낌은 인식이 보는 것 이전의 이미 보는 봄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기분은 인간의 존재에 속한다.'(《형이상학의 근본개념》) 세계의 정해진 궤도를 따르는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상황, 대상에 따라 다양하게 움직이는 느낌이다.

 

감수성의 결여는 온전한 삶일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것을 인식으로 대체한다고 해서 결코 가려지는 것도 아니다. 논쟁의 인신공격으로의 전락은 오히려 논쟁하지 않음만 못하다. 독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부정적 느낌은 암묵적이지만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안 좋은 느낌은 지우고 싶어진다. 그 느낌을 일으키는 상황, 대상을 멀리하고 싶어진다. 논쟁의 조건인 대꾸조차 닫아버리고 싶어진다. 반대로 좋은 느낌은 부조처럼 부각시키고 싶어진다. 그제 남녘에서 왕대밭 숲 찻잎을 땄다. 그 느낌은 이슬 같았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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