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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에서 이기는 한 가지 방법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3.03 17:07 |

대한민국의 정당들은 '선거정당'에 불과하다. 정치제도가 '참정권'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있어도 '국가'관리위원회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참정권? 선거를 치르면 치를수록 점점 더 '투표율'이 떨어지는 그런 것이다. 투표하고 나면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는 그런 것이다. 혹자는 '노예의 권리'로 느낄지 모른다.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해서 설령 '독일식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도입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을 채택한다 해도 지금보다 좀 나아진다는 의미 밖에는 없다.


결국 선거철이 돌아오면 정당들이 목을 매는 것은 '후보 개인의 득표력'이다. 제 아무리 그럴 법한 말로 포장해도 정당들은 후보 개인의 득표력을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후보 개인의 득표력이란 말할 것도 없이 후보 개인의 자질과 능력이 왜곡없이 알려지고 평가받을 때 갖게 되는 득표력이다.


빨대짓 또는 왜곡과 중상모략을 일삼는 사이비언론을 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엔 경쟁하는 후보도, 유권자도 함께 해야 한다.


개인의 득표력이 큰 후보들은 당선되면 제대로 일할 가능성이 높은 후보들이다. 아깝게 낙선되더라도 돌아보고 재기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후보들이다.


이들은 '자기 이름(고유명)'을 소중히 하는 고유성이 큰 후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후보들을 가려내는 것이 선거이어야 한다.


후보 개인의 고유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병역, 납세, 전과, 재산, 정체성과 같은 일반적 배거기준 외에 특수한(특수하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배거기준을 추가해야 한다.


이제껏 출현한 '성남지역 후보들'을 염두에 두고 특수한 배거기준을 적용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될 것이다.


정치적 행위에서 윤리적 추궁이 가능한 경우(꽤 많지?),
불리한 과거를 숨기는 경우(몇 있지?),
남의 것에 업혀가는 경우(몇 있지?),
저 혼자 잘났다고 설쳐대는 경우(있지?),
평생을 선거로 먹고 사는 경우(있지?),
선거철만 되면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있지?),
말 많은 경우(있지?),
언행에서 앞뒤가 안 맞는 경우(꽤 있지?),
가짜사건(언론플레이, 이벤트) 좋아하는 경우(꽤 있지?),
전략공천과 지역을 착오하는 경우(있겠지?),
지자체장 개입 소지가 있는 경우(있겠지?).


후보 개인의 득표력은 후보 개인 '밖'에도 있다. 이번 4·11 총선의 경우에는 이미 다 나와 있다. 정당 및 개인의 지지율, 후보단일화, 이런저런 형태의 경선, 야권연대, 전략공천 등.


이렇게 해서 구도가 짜이고 그 구도 속에 최종주자들의 경쟁이 이루어진다고 치자. 그러나 이 경쟁은 제대로 된 경쟁일 수 없다. 여기까지는 필요조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 부족한 '1%'는 무엇일까? 말이 부족한 1%지, 실은 그 질적 규정성에선 99%를 능가하는 것일지 모른다.


'소리는 침묵 속에 찾아오고 침묵 저편으로 사라진다.'


잊지 마시라. 많은 유권자들이 선거를, 아니 투표를 외면한다는 사실을. 여기엔 근본적인 문제, 즉 참정권에 한정된 정치제도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계 안에서 후보가 최선을 다할 경우, 그 최선을 다하는 후보에 주목하는 유권자들은 '현실적으로' 있기 마련이다. 역사는 한계된 것이니까.


필요조건을 충족시켰다 해도 부족한 1%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당선되기도 어렵고 석패하기도 어렵다.


더욱이 부족한 1%의 문제는 앞으로 여당은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 야당들이 '절호의 찬스'를 망가뜨리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여야 불문하고 가장 값진 것이 될지도 모른다.


흔해빠진 이론들은 커뮤니케이션을 메시지, 화자, 청자를 상정하고 메시지의 송신과 수신으로 환원한다. 그런가? 글러먹었다.


지금 이 세계에는 역사상 유례없는 수많은 메시지들이 폭주한다. 웅성거린다. 노이즈! 시끄럽다! 외면당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명함장사의 교훈'을 잊지 마시라.


정당, 후보, 언론의 상투적인 '송신-메시지-수신 회로'에 잡히지 않는 커뮤니케이션 영역들이 의외로 많다. 사회의 '중간'쯤? 몽테스키외가 고민했던 것이다.

 

거기에 살아 있는 사회적 관계망들이 있다. 그것을 찾아라. 귀 기울여라. 가능한 답을 되돌려주라. 아마 부족한 1%를 채울 수 있을지 모른다.

 

부산의 손수조는 하나의 참조사항이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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