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없는 어린이날  
어른은 어린이를 모른다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5.05 08:23 |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다. 좋은(?) 어른이라면 어린이에게 선물도 주고 즐거운 놀이시간을 마련해줄 것이다. 선물과 놀이에 즐거워하는 어린이를 보며 훌쩍 지나가버린 지난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어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물과 놀이가 능사가 아니다. 반복해서 보게 되는 흔해빠진 어린이날 풍경 속에는 실제의 어린이가 빠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마르크스는 어디선가 '어른은 다시 어린이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어른이 어린이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어린이처럼 될 수 있을 뿐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유치한 어른들은 얼마나 많은가! 이와 관련해 푸코는 '신경증에서 나타나는 어린이로의 퇴행'을 말하면서 그것이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 간격을 만든 모더니티의 산물임을 지적했다.


"현대 교육학의 모든 발전은 어린이를 어른의 갈등으로부터 보호하려는 흠잡을 데 없는 목표와 더불어 한 인간에게서 그의 어린이의 삶과 어른의 삶을 분리하는 거리를 강조한다. 어린이에게 갈등을 면하게 해주기 위해 어린이의 주요한 갈등, 즉 그의 어린 시절과 실제 삶 사이의 모순에 노출시키고 있다는 뜻이다."(《정신병과 심리학》)

 

» 어린이들이 중앙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며 즐기고 있다.   ⓒ수도권타임즈

돌이켜보면 국민학교(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학교 밖에서뿐 아니라 학교 안에서도 경험한 수많은 사실들은 꿈을 키우거나 아직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어린 시절과 실제 현실 사이의 모순투성이 그 자체였다. 그것에 예민했던 탓에 결국 고등학교 진학 후 내내 그 모순에 시달리다가 어떤 탈출구를 발견하고는 학교를 때려쳤다.


학교는 다양한 과목들을 통한 교의들과 규율을 통해 실제 현실과는 다른 가공의 신화를 내세웠다. 현재의 사회상을 정당화하기 일쑤였다. 그럼으로써 모순에 찬 현실을 꼭꼭 숨겼다. 교사들은 얼마나 무능했던가. 인용 글에서 푸코가 "교육학 속에서 한 사회는 그 사회의 황금시대를 꿈꾼다"고 말한 가공의 사태를 학교에서 절감한 것이다.


꿈의 기제를 속성으로 하는 학교가 어린이와 어른을 분할하는 인위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 기간만큼이나 어른이 아니라는 모라토리엄(결정유예) 기간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학교를 때려치고 현실 속에 뛰어들어 배우고 익힐수록 그 앎은 신체적임을 느꼈다. 자유롭게 읽었던 교과서가 아닌 책들도 신체적으로 와 닿았다.


개인적으로 수행된 훈련과정은 한 가지 분명한 인식을 주었다. 어린이와 어른의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몇 해 뒤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하면서 보다 완전한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 분할은 과거를 현재 시점으로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시점으로 투사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역사의 원칙상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학교 자체를 의문에 붙일 수 있다면 우선적으로 의무교육 자체부터 의문에 붙일 수 있어야 한다. 근대국가 이래 의무교육은 그 자체가 역사적이며 권력치고 거기에 사활을 걸지 않는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고도화에 맞춰 대폭 늘어난 교육기간도 의문에 붙일 수 있어야 한다. 그 기간만큼이나 교육과 현실의 모순이 격렬하게 체험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와 어른의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역으로 학교 자체를 통해 어린이와 어른의 분할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교육문제의 초점이 주어진 학교제도 안에서의 내용이나 질을 따지는 참교육, 무상급식, 무상교복, 취업 따위로 전락된 것은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어디까지나 과녁은 학교제도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직시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유행하는 대안학교도 교육제도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린이와 어른의 분할을 통해 발견되는 어린이는 한낱 전도된 관념상의 어린이에 지나지 않다. 실제의 어린이는 천차만별이다. 그것을 학교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동시에 어린이는 어른에 대해 다른 서로 닮은 점도 있다.

 

어른이 사회의 모순을 느낀다고 해도 그 전제되는 것들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는 반면 어린이는 그 전제에 의문을 갖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니체가 이렇게 말했다. "어린이는 어른과 마찬가지로 배우고 익히는 모든 것에서 문을 본다. 그 문은 어린이에게는 '입구'이지만 어른에게는 그저 '통로'에 불과하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


실제의 어린이는 천차만별이다. 동시에 어린이는 어른에 대해 다른 서로 닮은 점도 있다. 이 점에서 어린이는 확실히 어른과 다르다. 오늘도 어린이는 어른과 학교 자체에 의해 푸코적 의미의 어린이로 취급받고 있다. 어린이날 풍경은 그 정점에 있다. 그 결과는 어린이를 유치한 어른으로 돌변시키는 일이다. 누가 루소의 경구에 귀 기울일 것인가.


'어른은 어린이를 모른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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