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보호 간판이 나를 찡하게 했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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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타임즈 | 2016.01.16 19:17 |
2012-07-31 11:03:00 기사입력 | 류수남 ysn7675@hanmail.net     

[류수남 칼럼] 새벽종이 울리고, 새아침이 밝았다며 동네방네 사람들을 깨웠던 시절, 자연보호(自然保護)와 입산금지(入山禁止)그리고 산림녹화(山林綠化)와 소주밀식(小株密植)을 아시나요? 그리고 그 고마움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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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단어들은 지나간 한 시대에 우리국민들과 고락(苦樂)을 같이하며 이 나라의 강산(江山)을 지켰던 잊지 못 할 간판(看板)들이다. 
 
필자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물음은 위에 나열한 단어들의 뜻을 묻는 것 이 아니다. 그 고마움을 아는지 묻는 것이다. 시쳇말로20,30의 엄지 족들은 잘 모를 것 이다. 그러나 60,80의 광솔 족들은 잘 알 것이다.이들60,80의 광솔 족들은 자연보호 입산금지 산림녹화 소주밀식에 동참해 전력을 다하며 살았으니까 말이다. 
 
우리들이 지금 상쾌한 숲속의 메 길을 거닐며 산(山)좋고 물 좋은 계곡(溪谷)을 찾아 하루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 이 간판들의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고마움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해(河海)와 같은 은혜(恩惠)를 입고도 세월이가고 시대가 바뀌면 잊어지는 것이 인간(人間)이다. 아니 세월의 바뀌면 그래도 다행이다. 하루만 지나도 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그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많지가 않을 것 이다. 혹여(或如)이런 생각을 하는 필자를 정권을 빗대 힐난(詰難)하는 독자도 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이는 필자의 생각이니까. 
 
필자는 며칠 전에 부산을 다녀왔다. 귀가 길에 오른 필자는 오전11시 부산 발 서울행 새마을호 열차를 탔다. 필자를 실은 기차가 부산을 떠나 몇 시간을 달렸는지 모르지만 경북 구미역사가 목전으로 들어 왔다. 기차가 역구내로 진입하기위해 속도를 주려 승강장에 정차했다. 
 
그러자 우측전방에 있는 나지막한 야산(野山)이 창가에 앉아있는 필자의 눈을 고정시켰다. 두 눈을 찌푸려서 바라보니 그 야산의 중턱에는 등산객들의 쉼 자리인 팔각정(八角亭)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상에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구미시가지와 서울 부산 간을 오가는 경부선기찻길을 내려다보고 있는 대형입간판이 필자의 안경을 벗게 했다. 야산(野山)을 지키는 그 입간판(立看板)에는 자연보호(自然保護)라는 눈에 익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 볼 수없는 귀한(?)간판들이라 지인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아마 간판박물관(看板博物館)이 있었다면 그곳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하고 오래된 입간판이었다.
 
눈(雪)맞고 비(雨)맞고 바람(風)에 시달리는 온갖 풍상(風霜)속에서도 불평한마디 않고 이 나라 국토를 지키며 지금의 금수강산을 만든 간판이었다. 그리고 온 국민을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움직이게 했던 간판이다. 그랬던 이 간판(看板)을 얼마 만에 보는 것인가? 그리고 얼마 만에 읽어보는 자연보호든가? 효녀가수라는 수식어를 달고 활동하는 현숙 이가 부른 대중가요의 노랫말이 생각났다. 노랫말처럼 찡했다. 가슴이 찡 하네요 정말로... 그랬다. 
 
이는“자연보호„라는 대문짝만한 이름표를 달고 야트막한 동네 야산과 대로변을 지켰던 산(山)지기와 들(野)지기 간판을 오랜만에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걸었다. 자연보호야!(自然)네 친구들인 산림녹화(山林)와 입산금지(入山)그리고 소주밀식(小株)이는 지금어디서 뭘 하며 사느냐? 너희들끼리는 자주 만나느냐? 궁금하구나. 
 
필자와 눈 맞춤은 하면서도 말은 없었다. 이렇게 침묵하던 자연보호라는 간판과는 2~3분여의 용무를 끝낸 기차가 서울로 떠나면서 혜여 져야만 했다. 눈 맞춤도 잠시 친구들과 혜여 지는 것처럼 서운했다. 이들은 조반(朝飯)석죽(夕粥)과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지난1960~70년대 태산(泰山)보다도 높았던 맥령(麥嶺)을 넘던 간판들이었다. 그리고 또 이 고개를 깎아 없애는데 앞장섰던 간판들이다. 
 
필자도 이 시절 이들 간판 밑에서 많은 취재활동을 했던 터라 냉큼 잊혀 지지 않는다. 그래서 반갑고 눈에서 아물 거리는 것이다. 보릿고개, 이 얼마나 높았던 고개(嶺)였던가? 국민들은 이 넘기 힘들었던 맥령(麥嶺)의 정상을 보기위해 목을 뒤로 쳐들고 보려 해도 보이지 않았던 높디높은 고개가 아니었던가? 
 
하늘밑에 메(뫼)라고는 했지만 참으로 넘기 힘들었던 맥령(麥嶺)이었다. 지난1960~70년대를 같이 살았던 자연보호라는 선명한 글자의 입간판은 필자를30~40년 전으로 돌아가게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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