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묻는다  
정치의 재구성은 자유로운 개인으로부터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4.05 15:34 |

흔히 민주주의는 대중의 지지 획득이라고 한다. 대중의 지배, 즉 대중독재라고도 한다. 그러나 공시적으로 민주주의의 실체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건 간에 중요한 것은 '민이 주인인 주의'라는 말 그대로 민주주의를 민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민의 눈으로 이해하고 접근하고 실천하는 신념을 의미하는 것이다.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민이란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식의 민중사관에 말하는 피지배자가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이론인 계급투쟁이론의 변조에 불과하다. 다만 국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회라는 뜻이다. 사회는 민족이나 국민, 지역사회와 같은 공동체가 아니다. 사회의 기반은 계약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은 계약을 통해 사회를 이루는 시민이다.


따라서 시민의 눈으로 민주주의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곳간에서 인심난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주의국가의 군주와 사실상 동일했던 독재자 박정희는 아이러니하게도 시민의 경제적 기반을 창출한 공적이 있다. 독재자가 자기부정의 계기를 창출했다는 의미에서 최고의 공적이다. 박정희 신화의 패러독스다. 그 결과 민주화가 됐다.


지난 세기 80년대를 거치면서 제헌헌법 이래 법규범으로 제시되었던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법현실로 내실을 갖추게 되었다.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사회권, 청원권 등 민주주의적 권리들이 현실화되었다. 대통령제 하에서 노무현정권 시절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하는 드문 정치적 경험까지 하게 된 것도 이런 내실화에 기반한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가 급속히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민주화 이후 정도의 차이,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국가를 경영한 어떤 정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회민주주의는 복지를 미끼로 국가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가 전면에 나서면 민주주의는 후퇴한다. 사회가 후면으로 밀리고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전면화와 민주주의의 후퇴에 두 가지 결정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시민운동의 정치화, 청와대의 민간인 불법사찰이 그것이다. 이것을 보수정권의 문제로 대체하는 것은 국가의 생리를 외면하는 왜곡이다. 국가의 원리는 수탈과 재분배다. 국가의 수탈 독점은 무근거하다. 국가가 편법, 불법을 자행해서라도 민주주의와 충돌하는 이유다.


복지를 명료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국가를 전면화시키는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복지 자체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원리가 대내적으로는 수탈과 재분배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복지는 재분배에 해당된다. 수탈에 대한 당연한 의무다. 그것이 흔히 각종 정책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는 더 수탈하기 위해서 복지한다.


민주주의를 시민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자유로운 개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접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간인 불법사찰을 자행한 청와대든, 권력분립의 원칙에 따르지 않고 국회를 무시하는 정부든, 시민의 의견 수렴과 접촉 대신 대표성에 안주하는 의회든, 명망가 중심의 시민단체든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개념에서 핵심은 그 무엇으로도 대표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자신을 스스로 대표하지 않고 남을 통해 대표되는 것은 항상 노예화의 위험이 따른다. 슈미트의 국가주권론에 비해 루소의 인민주권론은 글러먹었지만 이런 의미에서만 "인민의 주권은 누군가에 의해서 대신 대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루소의 말을 수긍할 수 있다.


대표라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영원하지 않다. 정부? 영원하지 않다. 의회? 영원하지 않다. 정당? 영원하지 않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힘이 커지고 그 자유로운 연대가 가시화되면 될수록 이들 국가장치는 퇴조된다. 앞서나간 자유민주주의국가들에서 이미 분명해진 것처럼 한국도 투표율이 최악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


대표가 원래 자의적이라는 것은 알튀세르의 체제의 재생산을 위한 이른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개념을 원용한다면 실제를 왜곡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지나지 않다는 의미이다. 또 정신분석가 가타리가 말하듯이 개인의 현실적인 욕망과 표상인 대표 사이에는 서로 다른 것들이 이루어지고 있어 늘 어긋남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투표 거부를 선동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세계공화국이 창립되는 그 때까지는 오랜 동안 지속될 것이다. 그런 한에서는 현실적으로 국가장치를 거부할 수 없다. 더구나 국가는 그 기원에서 '국가에 대한 국가'로 탄생한 것이기에 역사가 증명하듯 전쟁을 도발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외적의 문제를 국가 말고는 달리 해결할 방법이 현재로선 없다.


당파에서 출발하는 한 민주주의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돌변한다. 때문에 권력을 가진 자만이 권력의 유혹에 빠져 반민주주의로 기우는 게 아니다. 청와대의 민간인 불법사찰만이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기초로 해야 할 정치를 경제, 전문가주의, 정책으로 환원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권력을 탈취하려는 자도 반민주주의로 기운다. 이데올로기적 의혹을 붙인 온갖 과거사 털기, 정권심판론에 기댄 국가주의, 아래와 외부가 없는 후보단일화에 기댄 패거리주의, 인식을 짓밟는 당파적 흑백논리, 무수한 복지공약 남발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다. 이미 충분히 보아왔고 이번 총선에서도 눈 따갑고 귀 아프게 또 보고 듣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 성분을 공공연하게 빼내고 그것을 권력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보수 진보 가릴 게 없다.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혐오와 외면은 전적으로 이 때문이다. 이것을 말하는 담론은 보기 힘들다. 온갖 구실과 흑백논리를 동원해 특정 당파를 지지 또는 배척하면서 그것을 민주주의로 착각하는 상투적인 담론만 보일 뿐이다.


권력에 매달리는 자들은 그가 누구건 자유로운 개인을 척도로 민주주의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보수나 진보의 이름을 내걸고 온갖 반민주주의 행태를 반복하면서 민주주의를 단지 정권연장이나 정권교체라는 권력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권력의 고정화를 막는 유일한 정치기술인 '제비뽑기'를 그들이 모르는 게 전혀 아니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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