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철 넘치는 자의식의 행군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고립, 어떻게 볼까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5.16 09:29 |

극좌적이다. 마침내 통합진보당에서 분신자살 시도까지 나왔다. 당권파 쪽이다. 분신자살을 시도한 자가 '전자투표 무효'를 외쳤다고 목격자들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혁신비상대책위원회를 무력화시키려는 당권파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혁신비대위는 당권파가 폭력으로 무력화시킨 중앙위원회가 온라인상으로 속개됨으로써 출발하게 되었다.


시계바늘이 80년대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80년대에 생생하게 목격하기도 했던 수많은 분신자살들이 떠오른다. 이 섬뜩한 죽음의 행열에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라고 저항했던 것도 떠오른다. 민중을 "주체이면서도 객체이고 주체가 아니면서도 객체가 아니다"(김지하, 《밥》)며 역동적으로 파악한 눈으로 분신자살사태를 봤기 때문이다.


80년대에는 이 사태에 공감했던 눈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김지하처럼 그것을 다르게 보는 눈도 있었다. 당시의 분위기로서는 '변절'이요 '전향'이요 하는 온갖 비난과 저지를 감수했던 용기 그 자체였다. 김지하가 누군가. 그보다 독재정권과 치열하게 싸운 투사가 있었는지 되물어도 무방한 반독재투쟁의 대선배가 아닌가.


이 다름이 주목되어야 한다. 이것은 김지하의 눈이 옳다고 주장하는 차원이 아니다. 전혀 시비를 가르려는 차원이 아니다. 이 세계에는 하나의 길, 하나의 눈만 있지 않다. 천 개의 길이 있고 천 개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신자살에 공감하는 눈에 대한 '외부', 그와는 다른 눈들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김지하의 눈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 통합진보당 강기갑 비대위원장이 기자회견에서 "진보의 실체가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수도권타임즈

통합진보당 혁신비대위가 출발하자 14일 강기갑 위원장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주장에 의해 형상화된 진보가 아니라, 국민 앞에 정체성을 인정받는 진보의 실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 간극을 좁혀나가는 것이 혁신이라 생각하며,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두고두고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강기갑, <기자회견문>)


정곡을 얻은 말이다. 때문에 그가 거론될 때마다 떠오르던 '공중부양 강기갑'이라는 고착적인 인상도 삭제하려 한다. "우리의 주장에 의해 형상화된 진보"와 "국민 앞에 정체성을 인정받는 진보"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전자가 자의식이라면 후자는 전자로 포획되지 않는 외부다. 통합진보당의 고립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낼 수는 없다.


정곡을 얻은 말은 통합진보당 바깥에서도 들린다. 15일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이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통해 말한 것이다. "진보정당 역사상 노동단체 대표가 이렇게 폭행을 당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조준호 공동대표는 통합진보당이 민주노총에 요구해 모시고 간 사례다. 노동자들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당내 부정선거의 진상조사 책임을 맡았던 조준호 공동대표가 지난 12일 중앙위원회에서 당권파가 자행한 폭력의 집중 타깃이 된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가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 전례 없는 폭력은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통합진보당이 오히려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폭력으로 짓밟은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봤기 때문이다.


정곡을 얻은 그의 말은 또 있다. "통합진보당에 대해 선거 때마다 지지하는 전술적 연대를 해왔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 현재의 통합진보당을 민주노총이 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의 통합진보당이 진보정당이냐 아니냐를 논하기 전에 공당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있다."


그가 강기갑 위원장처럼 "민주노총 조합원들, 간부들의 생각은 문제가 국민의 눈높이, 조합원들의 눈높이에서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문제는 통합진보당이 진보정당이나 아니냐가 아니다. 공당이냐 아니냐다. 일거에 당권파의 폭력 앞에 대의민주주의가 붕괴된 사실 앞에서 이 "근본적 회의"야 말로 통합진보당의 고립을 명시한다.


강기갑, 김영훈 두 위원장의 말들에 흐르는 무언가가 포착된다. 그것은 스스로 자멸을 초래하는 당권파의 고립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시사한다. 그것을 마르크스가 말한 것을 빌어 드러낼 수 있다. "상품소유자는 서로 사유권자로서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법적관계는 법률적으로 발달해 있든 아니든 어디까지나 계약이다."(마르크스, 《자본론》)


이것을 마르크스는 "상품(소유자)들의 복수성"으로 표현했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근본원리인 '개개인의 자유'란 이것의 정치적 표현이다. 노동자는 무산자가 아니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유자다. 그러나 노동력을 포함한 모든 상품은 팔릴지 말지, 이 끝없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해결방법은 '교환'뿐이다. 그렇지 않고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말한 '상품들의 복수성'은 '교환'으로 바꿔 말해도 좋다. 폐쇄적인 자기회로로 갇힌 자, 자기들만의 '언어게임'(비트겐슈타인) 안에 갇혀 타자와 교환하지 않는 자, 타자와 언어게임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집단은 고립을 자초한다. 그 결과는 '죽음'이다. 명백하다. 어떤 상품도 팔리지 않으면 상품도 아니며 '폐기'되고 만다.


그러나 끝없는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교환은 일어난다. 오히려 일상적으로 보편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세상이 돌아간다. 이것이 교환의 '신비성'이다. 바로 이 교환이 강기갑, 김영훈 두 위원장의 말들을 지탱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교환은 내가 투사할 수 없다. 신도 투사할 수 없다. 교환을 성립케 하는 것은 내가 아닌 타자이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타자는 내가 투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도 투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타자 앞에서 나는 '절망'해야 한다. 내가 내 것을 타자와 교환할 수 있을지 어떨지 절망해야 한다. 타자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이 심연의 딜레마에서 절망과 함께 언어게임의 공유가 어떤 것인지 모색하고, 실패와 오류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행해야 한다.


교환이라는 사회적, 보편적 법칙 앞에서는 어떤 신념도, 어떤 사상의식도, 어떤 이데올로기도 태양 앞의 눈덩이처럼 녹아버린다. NL? PD? 국참? 엿이나 먹어라. 교환의 법칙에서는 주사파에서 기원한 통합진보당 당권파가 어떤 집단인지 너무도 분명하다.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비밀스럽고 극좌적인 집단임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통합진보당 당권파, 그들은 지독하게 낡았다. 그들은 철철 넘치는 자의식으로 무장한 채 스스로 '고난의 행군'을 멈추지 않고 있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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