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변절자 XX들?  
임수경의 막말을 생각한다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2.06.08 12:04 |

"대한민국 왔으면 입 닥치고 조용히 살어, 이 변절자 XX들아!"


지금 널리 회자되고 있는 말이다. 뜨거운 감자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서 국민 앞에 다시 나타난 임수경이 탈북자에게 퍼부은 막말이다. 막말의 주인공 임수경은 누구던가. 지난 세기 90년대 초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은 임수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 임수경은 1989년 전대협이 결정한 '평양축전 참가투쟁' 방침에 따라 당시 전대협 의장 임종석의 위임을 받고 평양에서 7월 1일 개막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여한 전대협 대표다.


2. 임수경은 "자동차로 불과 네 시간이면 올 거리를 24시간을 비행하면서도 열흘이라는 기간이 걸려서"(평양 순안비행장에서의 임수경 인터뷰)" 6월 30일 이북에 도착했고, 47일간 이북 형제들에게 통일 염원의 갈증을 풀어주고 민족의 화해와 단합의 악수를 건넸다.


3. 임수경은 남북간의 군사적 대치상태와 국가보안법을 무릅쓰고 같은 해 8월 15일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문규현 신부와 함께 당당하게 군사분계선을 돌파한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다.

 

» 성남미디어 마인황 칼럼니스트   ⓒ수도권타임즈

당시 전대협이 임수경에 대해 말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전대협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임수경의 방북활동과 군사분계선을 통한 귀환은 이해나 해석의 범위 여부에도 불구하고 실제 있었던 사실로서의 역사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렇다면 그렇게 받아들인 임수경과 지금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서 탈북자에게 막말을 퍼부은 임수경은 맞는가 어떤가. 맞지 않는다. 이를테면 남북 모두의 주목을 받은 '통일의 꽃' 임수경과 막말하는 임수경이 어찌 연결이 되겠는가.


임수경의 막말은 논리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다. 탈북자는 대한민국에 와서 입 닥치고 조용히 살아야 할 사람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탈북자는 대한민국에 와서 입 열고 시끄럽게 살아야 할 사람임이 분명하다. 귀담아 들어야 할 대한민국 사람이다.


탈북자의 이북에 대한 변절은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일 것이다. 반대로 주사파의 대한민국에 대한 변절은 이북에 대한 충성일 것이다. 남북간에 '내전'을 겪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주사파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가, 탈북자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임수경의 '이 변절자 XX들아!' 운운은 일방에 섰을 때에만 나올 수 있는 표현이다. 그 일방이 어딘지도 분명하다. 대한민국의 사상과 제도는 대한민국에 충성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이북의 사상과 제도 역시 이북에 충성을 요구할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임수경이 방북활동 당시 전대협 대표로서 밝힌 "쌍방의 사상과 제도를그대로 인정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임수경이 이북의 김창룡 조선학생위원장과 함께 채택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관한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든 이북에서든 '통일 지향'이라는 차원에서는 변절이란 있을 수 없다. 역으로 말해서 일방을 부정하는 변절은 통일 지향적일 수 없다. 임수경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 기존에 형성된 이미지 '통일의 꽃'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임수경의 막말에 비유적으로 다음과 같은 비아냥이 가능할 것이다. "앞 남산의 딱따구리는 생구멍도 뚫는데 우리 집의 저 멍텅구리는 뚫어진 구멍도 못뚫네. 아리랑 고개는 열두나 고갠데 임자당신이 넘는 고개는 한 고개뿐이다."(정선아라리)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라는 공인의 언행으로서나 논리적으로나 임수경의 막말은 전대협이 말한 임수경과 괴리가 있다. 엄청나다. 왜 이런 심각한 괴리를 목격하게 되었나. 그녀가 탈북자에 대해 윤리적으로 지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감정 내지는 기분으로 접근한 탓이다.


주어진 사태를 판단하는데서 윤리적으로 지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을 미학적(감정적)으로 판단해버린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판단력 상실 그 자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라는 공인으로서나 통일 지향과 관련된 역사적 주인공으로서나 요구받는 판단력이란 관점에서다.


그렇다면 이 판단력 상실의 원인을 물을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과거의 그것과 오늘의 그것이 다른, (정당하다고 인정할 경우) 과거 전대협이 전개한 투쟁으로부터의 어떤 변절인가, 아니면 과거 전대협이 전개한 투쟁 자체에 이미 내포된 어떤 변절인가.

 

다시 나타난 임수경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역사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이 땅에서 전개된 역사라는 문맥에 놓인 어떤 사상의 문제라는 생각이다. 이 문제는 결코 이석기 같이 당을 달리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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