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 왕따라니? 정상인가?

정상인 | 2012.07.23 13:11 |

누구든 다른 한 인간을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로만, 또는 분석적 이성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더 이상 그런 신화는 존립하지 못한다. 게다가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쉽지 않다. '대면관계'에서조차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익명적이고 무명적인 관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게다가 나라는 존재는 모든 것을 위에서 투사해서 볼 수 있는 그런 눈, 어디에도 없는 그런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니체는 그런 눈을 '상상만 해도 끔찍한 눈'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인류를 벌써 다 멸망시키고도 남았을 눈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누구든 다른 한 인간을 '투사'하지 말라.

 

누구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분명 이재선이 다 옳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행위에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해야 한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도 구분해야 한다. 나아가 시비와 공사의 구분을 '크로스 체크'해야 한다. 이것이 '인식'이라는 것이다. '무지'의 반대인 인식이라는 것이다.

 

학교, 군대, 감옥, 관료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남이라는 한 지역공동체에서 이재선을 겨냥한 '집단적 왕따'가 자행되고 있다. 집단적 왕따에 가담하는 자들은 자극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그것이 '쾌락'이다. 역으로 쾌락이 없다면 이재선을 겨냥한 집단적 왕따는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쾌락은 선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악의'와 '악랄함'을 틈입시키기 마련이다. 이재선을 겨냥한 악의적이고 악랄한 집단적 왕따가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집단적 왕따가 그렇듯이 그 쾌락은 '음습한 형태'로 자행되고 있다. 거기에서 남과 다를 수 있는 자신의 정신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어디에도 없고 자신이 아닌 불특정다수의 정신, '군중(mass)'의 정신만 지배한다. 그것이 군중심리라는 것이다. 근거적이며 공개적인 비판은 없다. 대신 악플, SNS, 플랜카드 등을 통한 반복적인 선동, 조롱, 인신공격과 비방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음습한 형태는 집단적 왕따의 쾌락을 보장하는 실제적인 조건이다.

 

그 쾌락의 상극에 '이재선이라는 한 인간의 붕괴'가 예감되고 있다. 집단적 왕따는 대개 '비극'으로 종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집단의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집단적 왕따에 참여하는 군중은 '우리 중 하나인 나'라고 간주할 테지만 반대로 집단적 왕따를 당하는 상대는 우리 중 하나가 아닌 '우리 전체'를 실감한다. 소인국의 집단적 왕따는 거인국의 거대한 폭력으로 돌변하고 만다. 그가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참혹한 집단적 왕따가 자행되고 있다.

 

이재선을 겨냥한 집단적 왕따는 성남시장 이재명이 '원인 제공자'다. 성남시장 이재명의 생각과 행위가 이재선을 겨냥한 집단적 왕따와 긴밀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이재명이 페북에 올린 이재선을 겨냥한 자기변호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것에 따라서 그것을 증폭시키는 집단적 왕따가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상식과 양식을 무참히 짓밟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이재명과 그 주변에서 그것도 백주대낮에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재선-이재명'이라는 사적이고 가족적인 관계는 누구도 개입해선 안 되며 개입할 수도 없다. 그 관계는 외부적인 시각으로 봐야 한다. 윤리적인 의무다. 그러한 공적이고 비가족적인 눈으로는 그 관계가 서로가 원인이고 서로가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이재선이 원인이든 이재명이 원인이든 착종적인 것이든 그것을 누구도 건드려선 안 된다. 건드릴 수도 없다. 두 형제 간에 또는 가족 내에서 해결을 모색할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민들에게 비쳐지는 이재선은 그런 사적이고 가족인 관계에 놓인 이재선이 아니다. '성남시장 이재명을 비판하는 이재선'이다. 따라서 성남시장 이재명을 비판하는 이재선이 집단적 왕따의 대상인 이재선으로 돌변하는 사태는 전혀 정상적이지 않다. 게다가 그것은 성남시장 이재명과 그에 대한 공적인 비판과 직결되어 있다. 사실의 차이, 인식의 차이가 어처구니없는 정신병자 취급으로 현상하고 있다.

 

이재선을 비판할 수 있다면 이재선을 비판하라. 입체적으로 비판하라. 그의 비판이 옳다면 수용하면 되고 수용할 수 없다면 침묵하면 된다. 그의 비판이 옳지 않다면 옳지 않다고 비판하면 되고 비판할 수 없다면 침묵하면 된다. 그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그의 공적인 것만을 취해 비판하면 되고 사적인 것은 침묵하면 된다.

 

원래 사적인 것(또는 사적인 것의 하나인 가족적인 것)은 사적으로만 대응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집단적 왕따가 전혀 정당성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남의 가족사에 끼어드는가? 사생활 보호라는 기초개념조차 없다는 말인가? 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남의 가족사를 들먹이는 방식으로 집단적 왕따에 가세하는 자들은 대체 누구인가? 띠리리릿, 성남닥터, 용인사는 실성자 킬러, 와~울 어빠, 카프라, 앵그리버드, 주먹이운다 등등 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이재선에 대한 크로스 체크 식의 입체적 비판은 성남시장 이재명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남시장 이재명에 대한 정책이나 정치, 공적 인격에 대한 비판이 아닌 사적인 인신공격은 전혀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재선에 대한 집단적 왕따의 자행이 성남시장 이재명에 대한 완벽한 침묵과 동시에 병행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재선에 대한 집단적 왕따는 성남시장 이재명에 대한 공적 비판의 부재와 맞물려 있다. 명백하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남이라는 지역공동체에서 어느 순간부터 인식이 사라졌다. 언론도 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수도권타임즈도 예외가 아니다. 대신 무력할 수밖에 없는 한 공적 비판수행자에 대한 무지의 베일에 휩싸인 집단적 왕따가 횡횡하고 있다. 전례없는 일이다. 집단적 왕따는 이재선의 공적 비판을 사적 비방으로 매도하고 있다. 성남지역공동체의 부패의 증거다. 그와 함께 이재선이라는 한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이 예감되고 있다. 두려운 일이다.

 

누구도 다른 인간을 매도할 권리는 없다. 반대로 누구나 이웃을 사랑할 의무 밖에 없다.

이웃에 예외가 있을 리 만무하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성남시장 이재명은 자유로울 수 없다. 파국이 두렵다. 그렇다면 사회가 이재선을 공적으로 비판하고 동시에 이재선을 공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시민들의 몫이다. 상식과 양식, 인식을 가진 시민들의 몫이다. 이것이 악의적이고 악랄한 집단적 왕따를 자행하는 '쾌락의 공동체', '무지의 공동체'를 돌파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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