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성한 파리떼

파리사이드 | 2012.07.27 12:22 |

어떤 일이 생기면 사람은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묻는다. 즉 인과관계를 묻는다. 인간의 독특한 인식방법이다.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동물이 인과관계라는 인식을 하는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파리떼를 들여다보자.

 

파리들은 인간이 팔을 내저어 쫓으면 달아났다가도 다시 떼로 달려든다. 파리 특유의 인과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전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은 이런 파리들을 꺼려한다. 인간의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썩은 생선을 먹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인간은 파리들을 퇴치하거나 살충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을 개발해왔다. 반짝이, 파리채, 찍찍이, 파리사이드, 연막소독 등등. 이러한 기술들 역시 인과관계 인식을 전제한다. 파리들을 꺼려하는 것이 같은 인식을 전제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인과관계 인식은 어떤 경우든 작용인적인 접근방식이다. 반면 파리들은 인과관계 인식의 유무가 불분명하며 있다고 해도 인간과 다른 형상인적인 접근방식이다. 가령 파리사이드에 '끽!' 하는 순간까지도 달려드는 것이 파리들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일당백'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이 능히 백 사람을 상대할만한 출중한 능력이 있음을 가리킨다. 만약 이 말이 파리의 언어로 치환할 수 있다고 가정할 경우, 아마 파리들은 '백당일'을 가리킨다고 생각할 것이다.

 

파리들의 백당일에서 일이 형상인임은 물론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수단, 방법을 통해 이재선을 공격하고 있다. 반대로 이재선은 그를 공격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다. 두 공격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일당백과 백당일의 차이가 그것이다. 래디컬하게 말하면 작용인적 접근과 형상인적 접근의 차이다. 전자는 이재선에 해당되며 후자는 그가 상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이재선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파리떼와 일치한다.

 

인과관계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것은 형상인적 접근이 아닌 작용인적 접근이다. 근대 이래 그것은 '이성'으로 말해져 왔다. 이런 이유에서 파리들에게 이성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성이 없다는 것을 인간은 '실성'이라고 말한다.

 

무더운 여름철, 실성한 파리떼가 윙윙거리고 있다. 그 윙윙거림은 실은 이재선이 아니라 '썩은 생선'에서 나온다. 분명하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그렇게 생각한다. 반짝이, 파리채, 파리사이드, 연막소독이 실성한 파리떼에게 주어질 것이다.

 

악취나는 썩은 생선만이 남게 될 날도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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