藥으로 먹었던 燒酒  
"술 권하는 사회"...소주 한 잔의 인심을 생각한다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6.01.16 17:38 |
2006-12-20 00:00:00 기사입력 | 류수남 ysn7675@hanmail.net   


[류수남 칼럼] 술을 많이 마시게 되는 잦은 모임의 年末이 코 앞에 와 있다.  

社會의 人心이 술(酒)과 담배人心만 같다면 "죽이네(死)살리네(生)" 하며 다투는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술(酒)이 때로는 毒으로 변해 害가 되는 경우도 있고 담배는 百害無益이라지만 술과 담배인심이 다른 人心에 비해 厚한 것만은 分明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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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生面不知한 처지인데도 담배 한 가치를 달라면 누구든지 아무 소리 없이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담배 한가치 값보다 적은 백원짜리 銅錢 한개만 달라면 담배인심 같지는 않다. 또 술 도 그렇다. 
  
담배와 술은 男女老少와 職位의 높나짐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즐겨 마시고 피운다. 예나 지금이나 술은 담배와는 달리 음식으로 간주(看做)하고 권하는 경우가 많다. 
  
술은 모임이나 잔치의 크고 작음을 떠나 항상 중간에 버티고 서있다. 또 술은 둘 셋만 모여도 마시게 된다. 그래서 술이 인간과의 密接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술은 의학적인 설명과 관계없이 마시면 취한다고 한다. 또 마시는 사람의 氣分을 좋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勇氣를 주기도 한다고 한다. 
  
또 술은 입장이 困難했던 경우를 감싸고 가는 경우도 있다. 서슬이 시퍼렇고 冷情하기 이룰 데 없는 法도 술 앞에는 너그럽고 容恕가 되는 경우가 있다. 또 술은 詩人에게는 詩想을 畵家에는 畵像을 준다. 
  
예나지금이나 행세 깨나하는 사람들의 모임에는 꼭 술이 따른다. 또 술은 機會와 자리를 만든다고도 한다. 뿐만 아니다. 술은 말문을 열게 해서 응어리 졌던 감정을 풀어주고 새로운 因緣을 맺게 해주는 媒介役割을 하기도 한다. 
  
고려 때 시인 임춘(林椿)은 국순전(麴醇傳=술을 의인화한 가전 작품)에서 술은 국처사(麴處士)라며 만남에 그가(술)없으면 흥이 나지 않고 서로를 알기가 힘들다고 적고 있어 인간관계에 술의 역할을 말해주고 있다. 
  
또 심신이 괴롭거나 疲困함을 풀어주는 藥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술을 보고 옛날사람들은 藥酒라며 한잔 술을 권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도 藥酒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지금같이 燒酒가 흔치않던 시절에는 집에서 빚은 술에다 용수를 박고 떠내는 청주가 있었다. 또 청주를 뜨고 남은 술을 걸러낸 濁酒(막걸리)가 있다. 
  
이런 탁주나 청주와는 달리 燒酒는 불태워 내린 술이라 해서 지금의 소주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酒度가 높았다. 옛날의 燒酒는 淸酒나 濁酒와는 달리 穀食이 많이 들고 공정이 복잡하며 값이 비싸 庶民들은 감히 구경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또 소주는 사대부의 잔치에나 쓰이는 등 上流層들만 즐겨 마셨던 술로 高麗末에는 禁造令 까지 내렸었다고한다. 이렇게 귀한 몸들이 즐겨 마셨던 소주가 지금은 身分의 高下를 不問하고 누구든 시간 장소를 가리 않고 즐겨 마실 수 있는 술이 됐다.  이런 소주의 역사는 얼마나 됐을까? 정확한 역사는 알 수없으나 역사가 들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燒酒는 불태운 술이라 해서 1100년대 아라비아에서 香水를 만드는 과정에서 알코올을 증류하는 방법이 실용화됐다고 한다. 이것이 원(몽골)을 통해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퍼지면서 조선시대에 청주 탁주 등 200여종의 술중에 소주가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아리비아가 아니라 페르시아라는 설이 있으나 이 모두가 고려 말(1277년 충렬왕)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데 대해서는 이의가 없는 것으로 봐 지금 우리가 마시는 소주는 고려 말부터 먹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문헌에도 燒酒를 아라길(阿喇吉)또는 아리걸(阿里乞)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는 소주를 뜻하는 아랍어의 아락(araq)에서 유래된 것이 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우리나라에서도 소주 내릴 때 나는 냄새를 아라기 냄새 라하고 한다.  또 소주의 명산지인 開城에서도 燒酒를 아락주(阿樂酒)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런 소주의 명산지는 경북안동과 개성 제주등지 이며 서울에서는 공덕리( 마포구 공덕동)에서 많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이같이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소주에 얽힌 이야기는 또 있다. 

세종 때 화급을 다투는 病客이 마지막으로 소주 2잔을 마시고 벌레를 토한 후 병이 났다는 전설이 있다. 

또 성종실록에 수록된 문헌에는 일본에서 온 使臣에게 燒酒를 下賜하면 이를 가지고 자국으로 건너가 일본인들이 즐겨마시던 정종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또 이수광의 지봉설(1614)은 소주는 독하고 비싸서 다른 술같이 큰 잔으로는 못 마시고 작은 술잔에 따라 마셔 작은 술잔을 燒酒盞이라고 적고 있다.  
  
또 율곡 李珥도 여름에는 청주의 맛이 변하니 도수가 높아 변하지 않는 소주로 조상님의 祭祀에 쓸 것을 권했다고 전한다.  이렇듯 조상님의 祭酒로까지 권유를 받고 약으로 먹으며 貴함과 사랑을 받던 燒酒가 자칫 품위와 위상(?)을 잃고 자신의 잘못은 모른 채 뭇사람들로부터 그놈의 술 때문에 또 술이 원수야 등 천박한 말을 들을 때가 오고 있다. 
  
특히 모임이 잦은 올 연말연시에는 약으로 먹었던 술이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고 인정받는 조용한 모임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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