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원 컬럼-표현의 자유와 예술성은 어디까지인가?  
작가는 예술가로서의 혼(魂)을 작업 속에 녹여야
수도권타임즈(www.sntimes.kr)   
수도권타임즈 | 2017.03.08 18:50 |

사랑은 영화나 연극에서 아무런 상관이 없이 순수하게 몽땅 벗어도 여과 없이 자연스럽게 즐긴다.

그러나 간혹 BYE!같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예술을 빙자하여 흥행 목적이나 정치적인 상술(商術)을 부린다면 그 순간부터 예술작품으로는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번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BYE!은 정치쇼의 냄새가 강했고 장소도 그랬고 더욱이 전시를 승인하고 주최한 국회의원의 수준이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이를 허락한 최고책임자 국회의장 및 관계 사무처의 수준을 가늠해보는 국회의원의 세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행태가 벌어진 것이다. 민주주의를 기조로 하는미국의 국회의사당에서 이런 전시가 과연 가능했을까? 필자가 살아있는 동안은 볼 수 없는 풍광을 우린 모처럼 잘(?) 보고 느꼈을 것이다.


 풍자화와 순수 회화로서의 예술작품은 구분되어야BYE!은 문제가 되지 않는 풍자그림도 많았다. 그런데 일러스트 작가의 재미있는 그림(풍자화)이 미꾸라지 한마리가 온통 나라 전체를 흙탕물로 만드는 격이 되었고 시끄러운 정국에 기름을 부어 버렸다.


전시 장소의 부적절은 국회조차도 뒤늦게 인정하여 철수했고 더 큰 문제로 남아있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탈을 쓰고 언제, 어디서나, 아무나, 아무렇게나, 표현을 한다면 과연 보는 사람들은 공감할까?


앞에서 [올랭피아, 1863, 에두아르 마네 작 캔버스에 유채, 130*190cm,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 파리], [잠자는 비너스, 1510, 조르조네 작]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술작품으로 보여지려면 누드이든 얼굴을 변형하든 테마는 문제가 없다. 다만 그 표현이 풍자화 정도가 아닌 예술작품으로서 표현의 자유라는 범주에 넣으려면 절대 절명의 상황들이 순수하게 작품 속에 묻어 있어야 한다.


흥행을 위한, 이해관계로 득실을 계산한 작업들은 예술작품으로 보기 어렵다.

야구장에서 나체로 뛰어들거나 앉아서 나체로 관람을 한다면 바로 추방된다. 옷을 벗을 때는 벗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서 모두가 공감 될 때 가능하고 이는 영화, 연극, 미술작품이든 예술로서 얼마든지 표현의 자유를 누릴수 있다. 여인의 누드는 그 자체가 그리스 신화의 비너스 처럼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고 있다. 작가라면 비너스도 얼마든지 추하게 표현 할 수도 있다.


남성은 강한 직선의 매력이 있다면 여성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선의 감성을 누구나 느끼고 있다. 여성을 추하게 표현코자 함은 그 의도가 근본적으로 뭔가, 또 다른 목적 하에 의도적인 작업으로 보게 된다.


이번의 BYE!에서 더러운잠이라는 이구영 작가의 작품은, 원작 마네의 올랭피아라는 명화와 조르조네 잠자는 비너스를 합성 패러디하여 사람만을 바꿔치기한 풍자화 수준이다. 원작의 여인은 창녀를 상징한다고 한다. 물론 어느 특정 창녀를 표현 한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를 모함하거나 의도적으로 흥행을 목적으로 작업을 했거나 돈벌이를 위한 상술도 아니다. 다만, 한 시대를 과감하게 반영한 마네라는 예술가의 손에서 작가의 순수한 작품을 탄생 시킨 것이다. 여자의 나신(裸身)의 여신, 비너스를 표현하여 왔던 기존의 생각을 마네는 시대의 가장 치부스러운 창녀를 모델로 하여 아름다움을 당당하게 표현하였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혁명적인 발상으로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더러운 잠처럼 풍자를 빙자하여 음해 수준의 작업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더러운 잠은 예술가 세계에서는 얘기꺼리가 되지 않는 가치 자체를 논하려 하지 않고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고 나서는 이구영(민중미술협회 소속)은 당당하게 자신의 작업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더러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한다.


또한 BYE!을 주최한 표창원 의원도 똑같이 문제가 없어 전시를 허락했다고 한다. 이런 말이 나오자마자 더러운 잠에 누워있는 누드 박근혜대통령 대신 표창원 의원 부인으로 그렸고 이를 지켜보고 있는 최순실 얼굴은 표창원 의윈으로 바뀌어 패더러운 잠, 2016, 이구영 작 패러디한 그림이 인터넷에 온통 도배를 하고 있다.


마네 올랭피아원작에 패러디를 하여 누구든지 정치적인 음해를 한다면 진정 미술에 문외한 국민들도 쉽게 판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순수치 못한 작업은 예술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풍자로서 만평으로서 위트있는 작업(박용덕 - 중앙일보 만평)은 모든 이들에게 칭송받고 인정 받아야할 장르이다. 간결한 선과 색이 다양한 작가의 언어로 표현 될 때, 일러스트 작업의 풍자화는 칭송받기가 충분하다.


예술작품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선이 있어 기준이 아닌 기준의 평균치로 각종 공모전도 심사하게 된다. 요즘 부쩍 작가들이 유럽화(명화)를 패러디하여 전시를 많이 하고 있다. 그들의 작업에는 불순한 의도나 특정인의 인격을 격하시키고자 하는 뜻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존의 명화를 자신의 작업과 접목시켜서 또 다른 조형언어로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다. 이는 나름대로 패러디의 매력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나름대로 튀어보겠다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암튼 이번의 BYE!에서 비난받게 된 것은 이구영작가의 예술성이 부재하다는 여론이다.


흔히 영화 속에서 사랑의 성행위는 쉽게 찾아 볼수 있는데 이는 절대 절명의 분위기가 연출되는 상황일 때 공감하여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하게 된다. 한 작가의 편협된 정치적인 사고가 전시에 참여한 모두에게 필요 이상의 민폐(?)를 주고 있는 이색 기획전으로 그 흔적은 역사 속에 오래오래 떠올려 질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나 맘껏 즐길 수는 있으나 때와 장소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표현은 할 수 있으나 가치 있는, 의미있는 표현일 때 성스러운 자유를 인정받는다. 표현의 자유는 물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특정인을 지칭하거나 편협된 생각으로 모독하고 격을 떨어트리고자 의도된 자유의 표현은 민주주의에서 마치 방종(放縱)과도 같다.


따라서 소위 작가, 예술가는 보통사람들과 달라야 작가로서 살아남는다.

예술이라는 탈을 쓰고 가치를 보통사람과 똑같은 잣대로 표현한다면, 예술가로써는 인정받지 못한다. 작가는 예술가로서의 혼()을 작업 속에 녹여야한다. 순간의 인기몰이로 쓸데없는 작업으로 예술가를 모독하는 행태와 특정인을 음해하는 정치적인 상술(商術)작업은 비난받아 마땅함으로 절제 되어야 한다.

Copyrights © 2006 www.sntimes.kr All Rights Reserved
공감 비공감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band